1947년 12월 카라치에서 열린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 India Muslim League) 회의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독립된 무슬림 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34년부터 전인도 무슬림 연맹 의장을 맡아 온 무함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는 이후 전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의 의장으로 남았고, 남겨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이끌 제2대 의장을 물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이 얻은 것과 간디의 마지막 투쟁
인도가 독립을 맞을 때 양국은 군사·경제·재정 자원까지 분할해야 했습니다. 분할 협정에 따라 파키스탄에 귀속되기로 한 주들은 인도 정부에 30억 루피(300 크로르)의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파키스탄이 이를 상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당초 4년 내 상환으로 합의된 이 부채는 이후 1952년 8월 15일부터 50회에 걸쳐 나눠 갚기로 조정되었지만, 파키스탄은 매년 예산에 7천500만 루피를 적립해 놓고도 실제로 인도에 지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반면 파키스탄은 국방 비축물자의 대가로 인도에 5억5천만 루피(55 크로르)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고팔 고세(Gopal Godse)의 기록에 따르면, 인도 정부는 원래 파키스탄에 7억5천만 루피를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중 2억 루피는 즉시 지급되었습니다. 나머지 5억5천만 루피는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주들이 인도 정부에 진 빚을 갚을 때 지급하기로 했는데, 1947년 10월 22일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무력 침공하면서 사태는 급변합니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5억5천만 루피를 요구했고, 사르다르 발(Sardar Patel)은 “카슈미르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이 금액을 지급하겠다”며 선을 그었습니다.
발은 이 자금이 인도를 겨냥한 무기 구매에 쓰일 것이라고 판단했고, 네루 내각도 그의 결정을 승인했습니다. 그러자 지나는 총독 마운트배튼에게 압력을 가했고, 마운트배튼은 간디에게 네루와 발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발이 거절하자 간디는 1948년 1월 13일 델리에서 ‘죽음의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발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델리를 떠나 봄베이로 향했습니다.
간디가 단식 해제 조건으로 내건 것은 5억5천만 루피를 무조건, 지체 없이 파키스탄에 지급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는 국민 여론의 거센 분노를 샀습니다.
사르다르 발의 성명
1948년 1월 12일, 사르다르 발은 기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우리는 카슈미르 침공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이 협정의 이행을 중단함으로써 정당한 조처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 협약에 충실할 의무가 있으며, 그 사실을 파키스탄 정부에 두고두고 밝혀 왔습니다. 그러나 이 협정에는 일정 기한 안에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식의 강제 규정은 없습니다. 파키스탄은 군대를 앞세워 우리와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고, 그 확전 가능성 또한 커서 협정이 남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부채 부담을 인수하고 재산을 분할하는 방식의 합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파키스탄은 잔여 금액의 지급을 요구할 명분을 결코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결국 간디의 압박 속에서 네루는 1948년 1월 15일 파키스탄에 5억5천만 루피를 지급했습니다. 힌두교도들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끊임없이 인도로 들어오던, 그리고 인도와 전쟁 중이던 나라에 돈을 보내는 역설적인 상황이었고, 그 시점까지도 파키스탄 소속 주들은 30억 루피의 빚을 갚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통합 설득 계획과 모스크 앞 농성
그 무렵 간디는 대표단과 함께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걸어서 넘어, 지나를 직접 만나 파키스탄이 다시 인도와 통합되도록 설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봄베이의 면화 상인 자한기르 파텔(Jahangir Patel)을 파키스탄에 보내 지나 면담과 방문 준비를 주선하게 했지만, 도보 순례가 주는 영적 감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간디에게는 비르라 저택의 잔디밭에 오를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인도로 피신한 힌두 난민들이 대거 델리로 몰려들어 힌두 사원·구르드와라·학교 등에 몸을 숨겼고, 공공장소가 모두 가득 차자 델리의 한 모스크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간디는 모스크 앞에 앉아 농성하며 정부에 난민들을 즉각 내보낼 것을 요구했고, 정부는 결국 강경 조치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힌두 난민들이 모스크에서 쫓겨나던 날 델리에는 폭우가 쏟아져, 쫓겨난 여성과 아이들은 추위에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해집니다. 마하라슈트라에서 델리에 머물던 젊은 언론인 나투람 고세(Nathuram Godse)가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자기 나라에서 추위와 허기에 떠는 힌두 아이들을 보며 간디 살해를 결심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세는 델리 비르라 저택(Birla Bhawan)에서 간디를 사살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고세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하며 최종적 판단은 미래에 중립적으로 쓰여질 역사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 계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