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타이타닉: 산산조각난 삶의 연가

타이타닉: 산산조각난 삶의 연가
1909년, '침몰하지 않는 몰리'로 불린 마거릿 브라운 • WIKIMEDIA COMMONS

1,5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이었지만,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해난 사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해는 아니었다. 1945년 소련 잠수함에 격침된 독일 선박 두 척을 예로 들 수 있다. 피난민을 실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약 8,000명, 병원선이었던 고야호는 약 6,000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럼에도 '꿈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의 전설은 사람들 마음속 깊이 새겨졌고, 승객과 선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많은 책과 영화로 이어졌다.

프레더릭 호이트(Frederick Hoyt)는 아내를 구명보트에 안전하게 태운 뒤 물속으로 뛰어들어 같은 방향으로 헤엄쳐 갔고,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이 비극은 생존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적어도 일곱 명이 자살로 생을 마쳤지만, 그것이 반드시 타이타닉과 직접 연관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이들은 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헬렌 비숍(Helen Bishop)은 항해 당시 임신 중이던 아들을 출산했으나 아기는 태어난 며칠 뒤 세상을 떠났고, 1년 후에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낙상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언씽커블 몰리, 마거릿 브라운

훗날 할리우드가 '침몰하지 않는 몰리(Unsinkable Molly)'라 불렀던 마거릿 브라운(Margaret Brown)은 자신이 보트에 오를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다. 침몰 후에는 현장으로 돌아가 더 많은 생명을 구하자고 주장했으며, 카르파티아호에 승선한 뒤에도 생존자들을 돌보며 헌신했다.

타이타닉 고아

당시 4세였던 미셸 나브라틸(Michel Navratil)과 2세였던 동생 에드먼(Edmond)은 아버지 덕분에 마지막 구명보트에 올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침몰 속에서 생을 마쳤다. 카르파티아호에 실려 왔지만, 프랑스어만 하는 이 아이들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 앤 매들린 애스터 부부

존 제이콥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IV)와 두 번째 아내 매들린 탤메지 포스(Madeleine Talmage Force)는 그날 밤 이별을 강요당한 수많은 부부 중 하나였다. 아내는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지만, 그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옷에 수놓인 이니셜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감시병 프레더릭 플리트

빙산의 접근을 발견하고 항해사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 바로 감시병 프레더릭 플리트(Frederick Fleet)였다. 그는 살아남아 여러 해운 회사에서 계속 일했다. 그러나 우울증과 아내의 죽음에 시달리던 그는 1965년, 77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시도어 앤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

60대의 남편 이시도어(Isidor)가 선원의 거듭된 권유에도 배에 오르기를 거부하자, 아이다(Ida) 역시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함께 갈 거예요."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배 갑판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벤저민 구겐하임

백만장자 플레이보이였던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이 죽음 앞에서 보인 당찬 태도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정부(情婦)를 구명보트에 태운 뒤, 그는 구명조끼를 벗고 외투를 걸치며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차림새로 신사답게 가라앉을 준비를 마쳤소."

월러스 하틀리와 오케스트라

그는 타이타닉이 가라앉는 동안 끝까지 연주를 이어간 8인조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음악가들은 밀려오는 물을 피해 자리를 옮기며 연주를 계속했고, 죽음이 눈앞에 닥쳤음을 깨달은 순간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세 번의 해난 사고를 견딘 바이올렛 제솝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의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은 타이타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1년 전에는 올림픽호가 군함과 충돌하는 사고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왔고, 4년 후인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브리타닉호 침몰에서도 목숨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