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라무샤르 전투는 이란-이라크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혹독하고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도시가 '피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79년만 해도 이란의 호라무샤르에는 무려 22만 명의 주민이 풍요롭게 살고 있었다.
국가 최대 항구, 혼란의 진원지
호라무샤르은 당시 이란 최대의 항구 도시였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도시 내 반정부 세력들이 이라크에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도시를 뒤흔드는 테러 공격이 잇따르며 다가올 참화의 전조를 알렸다.
이라크군의 대규모 침공
1980년 9월 17일, 사담 후세인은 국경 분쟁을 조정했던 알제 협정의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9월 22일, 이라크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선두에 선 것은 2개 기갑여단, 1개 차량화여단, 6개 특수부대 대대로 증강된 제3기갑사단이었다.
여기에 특수부대 대대를 지원한 제5기계화사단, 제2보병사단 소속 일부 병력, '공화국 수비대' 돌격대 대대, 준군사 조직까지 투입되었다. 결국 이라크는 포병 600문의 화력 지원을 받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이 단일 전투에 쏟아부은 것이다.
절망적인 전력 불균형
반면 이란측 방어 병력은 약 3,000명에 불과했다. 차량화대대 1개, 수비대대 1개, 해군 특수부대 대대 1개, 그리고 혁명수비대와 자원병들로 구성된 병력이었으나, 다행히 처프탱 전차 몇 대를 운용할 수는 있었다.
이란군은 민간인을 먼저 대피시킨 뒤 3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1차 방어선은 정규군이, 2차 방어선에는 포병과 기갑부대가, 3차 방어선은 자원병들이 배치되었다.
개전: 폭격과 포위
이라크의 침공은 1980년 9월 22일 오후 대규모 공습으로 시작되었고, 곧이어 포격이 도시 일대를 유린했다. 국경에서 불과 10km 떨어진 호라무샤르 교외까지 이라크군이 빠르게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피난 가지 못한 이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해 질 녘에는 500여 대의 이라크 전차가 호라무샤르-아바즈 도로를 따라 진격하며 도시를 사실상 고립시켰다. 이란군의 임시 방어진은 비교적 일찍 무너졌지만, 시가지에까지 전차와 장갑차를 끌고 들어온 이라크군 역시 상당한 손실을 치러야 했다.
9월 23일 아침, 도시는 거의 완전히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란군은 흔들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라크군이 외곽 방어선을 점령하기까지는 격렬한 전투가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집집마다, 층층이 벌어진 시가전
9월 30일, 이라크 특공대 60여 명이 도시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재차 공세에 나섰고, 기차역·병영·도축장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이란군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와 함께 몰로토프 칵테일로 맞섰다. 이라크군의 피해는 막대했지만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서서히 전세를 넓혀갔다. 결정적인 순간 이란군의 처프탱 전차들이 개입하면서 이라크군은 밀려났다.
이후 이라크군의 새로운 공세로 도축장과 기차역이 함락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란군의 반격에 밀려 다시 도시 밖으로 내몰린 것이다.
끊임없는 공세와 도시의 함락
이 패배 후 이라크군은 10월 11일 발생할 차기 공격을 더욱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 사이 열흘 동안 이라크의 포병과 공군은 도시를 집중 포격했다. 10월 14일, 이라크군은 마침내 도심 안쪽으로 재진입했고, 이란군 전차와 저항 거점들을 하나씩 무력화해 나갔다.
10월 16일에는 항구와 병영을 장악하고, 이란군 사령부가 있던 대모스크가 자리한 도심으로 접근했다. 전투는 집에서 집으로, 층에서 층으로 이어졌고, 이란군은 칼까지 들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이렇게 엄청난 피를 치른 끝에 이라크군은 10월 21일 도심 한복판에 도달해 주지사 관저와 아바단으로 통하는 다리 장악을 시도했다. 목표는 48시간 안에 달성해야 했고, 임무는 이라크 특공대 5개 대대에 맡겨졌다.
'피의 도시'의 마지막 순간
10월 24일,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다리는 5시간의 격전 끝에 함락되었지만 관저 건물의 전투는 더 길게 이어졌다. 오후에 건물로 돌입한 이라크군은 다시 밀려났고, 밤에 감행한 새로운 공격 끝에야 마침내 건물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시점에서 살아남은 방어자는 300명 남짓이었고, 버틸 수 있는 곳은 대모스크뿐이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10월 25~26일 밤 생존한 이란 병사들은 카룬 강을 따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부 혁명수비대 출신 청년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는 남아 11월 10일까지 필사적인 저항을 이어갔다. 승자의 대가 또한 컸다. 이라크군은 사상자 7,000명과 전차·장갑차 200대 이상을 잃었다.
이란군의 손실 역시 이에 필적했으며, 여기에 침공 초기 몇 시간 동안 학살당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까지 더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