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에서 기차를 노린 유사한 공격이 벌어졌다. 양쪽 모두에서 남성의 성별은 곧 정체성이자 생사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들이 할례를 받은 남성 승객이라면 누구든 살해했다. 파키스탄에서도 습격자들은 모든 남성 여행객의 몸을 검사했다. 할례의 흔적이 없으면 목숨도 없었다. 라호르와 암리차르 역에 도착하는 열차마다 시신과 부상자로 가득 차 있던 날들이 있었다.
자유의 대가
두 나라의 국민들은 자유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 실상을 인도에서 평화유지 장교로 파견된 아슈위니 두베이 대령이 라호르에서 직접 목격했다. 부상자와 시신으로 가득 찬 열차 한 대가 라호르 승강장에 멈춰 섰다. 각 객차마다 침묵이 흘렀다. 문틈 아래로 피가 흘러나와 선로에 번져갔다. 마치 극심한 더위 속에서 냉장고의 얼음이 녹아내리듯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병사들
무장 병사들이 열차 호위를 위해 동행하곤 했지만, 힌두교도들이 공격하면 힌두교도 출신 병사들은 그들에게 발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 병사들 역시 무슬림 폭도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특파원이 기록한 지옥
뉴욕타임스 특파원 로버트 트럼불은 이렇게 적었다.
"그 어떤 끔찍한 광경도 인도에서 목격한 이 광경만큼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요즘 인도에는 비가 내리지만, 그 비보다 많은 것이 쏟아진다. 시신은 수백 구씩 발견되는데, 눈이나 코, 팔다리, 성기를 잃은 채 저주받은 유령처럼 방황하는 수천 명의 인도인들을 대체 누가 세었단 말인가?"
"총탄에 맞아 즉사할 기회는 운이 좋은 사람에게나 돌아갔다. 대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음이 확실해질 만큼 구타당한 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버려졌다. 타는 듯한 더위와 파리 떼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과연 상상이 가능하겠는가?"
악마가 된 인간들
악귀 같은 잔혹함에 있어서는 어느 집단 하나 다른 집단보다 나은 곳이 없었다. 펀잽 경계군의 한 장교는 시크교도들의 습격을 받은 마을에 들어섰다가 네 명의 무슬림 갓난아기가 돼지를 굽듯 불 위에서 구워진 것을 발견했다. 또 다른 장교는 학살터로 끌려가던 힌두 여성들을 목격했는데, 그들의 가슴은 무슬림 광신도들에 의해 이미 잘려 나가 있었다.
군대마저 분열되다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동펀잽과 서펀잽에서 격렬한 종교 폭동 소식이 쏟아져 들어왔고, 델리부터 카라치까지 그 불길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서 폭동의 불길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올랐다. 군대 분할의 결과로 공동체 갈등이 군대 안으로 스며들었다. 병사들은 소요를 진압하는 대신 오히려 폭력에 가담했고, 군과 행정부의 일부 장교들은 이 혼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펀잽의 영국 총독 프랜시스 무디 경은 1947년 9월 5일 파키스탄 총독 무함마드 알리 지나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저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크교도들이 국경을 어떻게 넘고 있는지는 걱정하지 않는다고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최대한 빨리 몰아내는 일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희생
이 폭동으로 인도와 파키스탄 양쪽에서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몇 명이 난민이 되었는지, 몇 명의 여성이 납치되어 경매에 넘겨졌는지 정확한 수치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펀잽 지역에서만 벌어진 참상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60만 명이 살해되었다. 1,4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10만 명의 젊은 여성들이 납치되어 강제 개종당한 뒤 양측에 의해 경매에 넘겨졌다. 펀잽과 벵골을 합산하고 다시 두 나라 전체를 계산하면 이런 사건의 규모는 최소 두 배를 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