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7년 인도 분할이 가져온 참화는 단순한 영토의 재편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 학살과 강제 이주였다. 당시 목격자들과 기록자들이 남긴 증언은 그 참상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증언으로 남은 학살의 기록
마이클 브레처(Michael Brecher)는 이렇게 기록했다.
"소문과 공포, 그리고 광기로 인해 약 1천2백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교환되었는데, 그 절반은 힌두교도였고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이었다. 한 해가 끝나기도 전에 약 50만 명이 죽거나 살해당했다. 델리의 거리는 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즐리(Moseley)는 더욱 처절한 참상을 적었다.
"이 인구 교환 과정에서 60만 명이 살해되었고, 1천4백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10만 명의 어린 소녀들이 납치되거나 강제로 경매에 넘겨졌다. ……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벽에 내리쳤고, 소녀들은 강간당한 뒤 가슴이 잘렸으며, 임산부들의 배는 갈라져 버렸다."
아요디야 싱(Ayodhya Singh)은 진나와 리아카트 알리의 정책을 날카롭게 문제 삼았다.
"진나나 리아카트 알리 총리가 파키스탄에서 벌어지는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학살을 막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는가? 무디 같은 제국주의 대리인들을 즉시 축출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파키스탄에서 몰아내는 것이 일부 무슬림 부르주아와 자민다르(지주)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난민 행렬과 간디의 등장
서펀자브(서부 펀자브)에서 출발한 첫 번째 시크·힌두 난민 행렬이 인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펀자브 지역의 약 100개 마을과 도시에서 왔으며, 그 수는 약 3만 2천 명에 달했다. 끔찍한 고문과 굴욕을 견뎌낸 이들은 목숨을 건지다시피 하며 인도에 도착했고, 델리에서 120마일(약 190km) 떨어진 태양과 먼지 속의 인도 최초 난민 수용소에 정착했다.
간디는 그 난민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고, 네루 총리도 동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간디와 네루의 차량이 수용소에 도착하자,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며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8월, 네루 총리와 파키스탄의 리아카트 알리 총리는 열린 지프차에 나란히 탑승하여 인도 펀자브와 파키스탄 펀자브의 폭동 피해 지역을 함께 순회했다. 반면 간디는 펀자브에 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델리에 머물러야 했다. 증오와 폭력이라는 역병의 세균은 이미 인도의 수도 델리까지 번져 있었던 것이다.
델리로 번진 불길
한편 캘커타에서 단식을 마친 간디에게 악소식이 전해졌다. 델리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래리 콜린스(Larry Collins)와 도미니크 라피에르(Dominique Lapierre)는 이렇게 주장했다.
"시크교도의 아칼리 달과 힌두교도의 국민의용단(RSS)이 합세하여 델리를 종파 폭동의 화염 속에 집어던졌다."
대부분이 이제 파키스탄행을 원하게 된 델리의 무슬림들은 난민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들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습격에서는 목숨을 건졌지만, 질병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결한 환경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했다. 15만~20만 명의 무슬림 난민이 후마윤 묘와 구요새(푸라나 킬라)에 수용되었다.
그들은 너무나 공포에 떨어져서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조차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시신을 높은 담벼락 너머로 던져버리면 독수리와 개들이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먹었다.
그러나 간디가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난민들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진나가 인도에 있는 동안 무슬림들은 언제나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여겼다. 이제 진나가 파키스탄으로 떠나자, 무슬림들은 그의 정적(政敵)인 간디를 메시아로 받들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행렬
그 후 두 달 동안, 펀자브 평원을 가로지르며 이동하는 비참한 인류의 행렬은 총독 관저 지도 위에서 붉은 머리 핀 모양으로, 개미처럼 움직여 갔다. 그 작은 붉은 핀 하나하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오직 인간만이 저질렀던, 가장 참혹한 인간의 고통을 상징했다.
난민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해 왔고, 그로 인해 많은 특별하고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80만 명이 걸어가는 모습이 담긴 행렬에 필적할 만한 장면이 있을까? 인도 분할이 남긴 그 행렬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것으로, 상상만 해도 가슴이 조여온다.
크고 작은 수많은 행렬이 이곳저곳을 오갔다. 행렬이 전진할 때마다 총독 관저 지도 위의 붉은 핀들은 천천히 옮겨졌다. 매일 아침 정부 비행기들이 순찰 비행을 나섰다. 식량과 의약품이라는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행렬 위에 투하했다. 또한 약탈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주요 행렬에는 경비 병력이 따랐다.
사람들은 총구를 겨눈 채 모든 것을 나누려 했다. 하늘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행렬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종사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한 조종사는 시속 200마일(약 320km)의 속도로 15분을 내내 비행했지만, 행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낮에는 행렬의 이동으로 긴 먼지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수천 마리의 소와 물소, 소달구지와 낙타 수레가 행렬과 함께 이동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밤이 되면 모두가 피로와 허기에 지쳐 발걸음을 멈추었다. 각 가정은 자기들만의 불을 피워, 말린 음식이라도 준비해 굶주린 배를 달래려 했다. 이제 먼지 대신 연기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한곳에 수직으로 치솟는 길고 높은 연기 줄기, 그 밑바닥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