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국민회의파와 무슬림 연맹 지도자들과의 여러 차례 협상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도의 분할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무슬림 다수 지역에는 반드시 파키스탄이라는 별도의 국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세력은 영원히 서로 충돌하며 내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는 인도 분할안을 마련해 영국 애틀리 정부로 보냈는데, 계획서와 함께 동봉된 한 통의 편지에는 뼈아픈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분할은 순전한 광기이다. 만약 이 믿기 힘든 종족 폭동이 모든 개개인을 야만적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분할 대신 단 하나의 대안이라도 찾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 광기를 받아들이도록 유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터무니없는 결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인도인 자신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인도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책임을 인도에 전가한 마운트배튼
흥미로운 점은, 마운트배튼이 몇 달에 걸친 설득 끝에 겨우 인도 분할에 동의를 이끌어낸 바로 그 인도 지도자들에게, 정작 분할의 책임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보낸 보고서에서 '인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민회의파 지도자들'이라는 말을 썼어야 했다는 지적입니다. 즉 분할 결정은 인도 전체의 의사라기보다 당시 지도부의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간디, 1947년 3월 31일의 회담
1947년 3월 31일, 마하트마 간디는 마운트배튼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발라브바이 파텔과 자와할랄 네루마저 이미 분할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총독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마울라나 아불 칼람 아자드가 간디를 찾았습니다. 아자드는 자신의 회고록 『인도는 자유를 얻다(India Wins Freedom)』에 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를 찾아갔다. 간디의 첫마디는 비꼬음이 섞인 물음이었다. ‘분할이 이제 눈앞의 위협이 되었다. 발라브바이는 물론 자와할랄조차 굴복한 모양이군.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를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당신도 변했는가?’”
아자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분할에 반대해 왔고 지금도 반대합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절망적인 적대감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자와할랄과 사르다르 파텔마저 패배를 인정하고 무기를 내려놓은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당신만이 분할에 맞서 일어선다면 우리는 아직 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당신마저 동의한다면, 두려운 일이지만 인도의 운명은 끝장일 것입니다.”
간디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당신까지 무슨 질문을 하는가? 국민회의가 분할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내 시체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인도의 분할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에 권한이 있다면, 국민회의가 이를 승인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틀 만에 바뀐 간디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아자드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날 늦게 간디는 다시 마운트배튼을 만났고, 다음 날 또 만났으며, 4월 2일에 세 번째 면담을 가졌습니다. 첫 번째 면담에서 돌아오자마자 사르다르 파텔이 간디에게 다가가 무려 두 시간 동안 귓속말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 간디를 다시 만난 아자드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간디마저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왜 마음을 바꿨는가
왜 간디도 분할 찬성 쪽으로 선회했을까요? 아자드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라의 통합을 지키기 위해 간디는 마운트배튼에게 과감한 제안을 했습니다. 진나를 총리로 하여 정부를 구성하게 하고, 내각 구성원 선발권 역시 진나에게 맡기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운트배튼은 이 제안에 호감을 보였지만, 네루와 파텔이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결국 간디는 이 방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자드는 간디가 자신에게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간디는 그 일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분할이 불가피해 보인다.’”
결국 아자드의 분석에 따르면, 간디는 사르다르 파텔의 강한 영향력을 이기지 못하고 분할을 막지 못했으며, 스스로도 분할 찬성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통합을 위해 마지막 카드로 던진 진나 중심 정부 구성안마저 좌파되면서, 간디의 저항은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947년 8월, 인도는 분할되었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이동과 폭력의 비극이 뒤따랐습니다. “언젠가 인도인들은 후회할 것”이라던 마운트배튼의 경고는, 오늘날까지도 인도-파키스탄 관계의 그늘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