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우라르투 문명: 아시리아에 정면으로 맞선 고대 산악 왕국

우라르투 문명: 아시리아에 정면으로 맞선 고대 산악 왕국

기원전 800년 무렵, 서아시아 여러 나라 위에 아시리아의 예속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시리아 군대의 공세를 막아설 자는 없어 보였다. 바빌론의 미약한 왕들도, 거대한 히타이트 국가의 잔재로 남은 소국들의 통치자들도, 이란 고원과 트란스코카서스(남캅카스)에 살던 부족들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시리아의 지배가 확립되는 것은 이 민족들에게 재앙 그 자체였다. 정복된 나라들은 끔찍하게 유린당하고, 사람들은 대거 학살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힘이 실로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 시기에, 소아시아에는 강대한 적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울 결단을 내리고 치열한 대결에서 거의 승리할 뻔한 민족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 터키, 이란, 아르메니아의 국경이 만나는 지역 일대, 트란스코카서스의 산골짜기에 살던 밀접한 혈연 관계의 부족들이었다. 당시 이 땅에는 두 개의 강력한 부족 연합, 즉 우라르투와 만나라는 두 국가가 성립해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각각 반 호수와 우르미아 호수 유역이었다.

아시리아가 과소평가한 산악 민족

아시리아인들은 한동안 자국 북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계의 지배자를 자처하던 그들은 우라르투인을 수많은 준야만 부족 중 하나로 여기며, 복종하지 않으면 응징 원정으로 벌을 주면 될 것이라 믿었다. 아시리아인들은 명백히 우라르투인을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후에 이 민족은 군사적·정치적·행정적·문화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실 아시리아의 소아시아 내 입지는 겉보기만큼 탄탄하지 않았고, 우라르투의 왕 메누아(재위 기원전 810~786년)와 그의 아들 아르기슈티 1세(재위 기원전 786~764년)는 이 약점을 능숙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인도유럽어족의 부상과 교역로 장악

우라르투인은 히타이트인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했다. 발칸반도와 흑해 초원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이주 덕분에 서아시아의 인도유럽계 민족 수는 계속 늘어났다. 북쪽에서 아시리아를 향해 무시무시한 인도유럽계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기원전 730년 이후 킴메르인과 스키타이 같은 유목민이 트란스코카서스와 소아시아에 등장하면서 이 '구름'은 더욱 험악한 윤곽을 드러냈다.

히타이트 왕국이 붕괴한(대략 기원전 1200년) 뒤, 언어·종교·문화가 비슷한 이 모든 인도유럽계 민족과 부족은 통합의 구심점을 잃었다. 그 빈자리를 우라르투의 왕들이 활발한 행동으로 채웠다. 메누아와 아르기슈티 1세는 주로 인도유럽계 민족이 살던 무차치르(아시리아 수도들의 동쪽)와 북시리아(서쪽) 지역을 점차 손에 넣었다. 이로써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주요 교역로를 차단하고, 군사적·상업적 활동의 방향을 남쪽 하나로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는 이미 아시리아 왕들을 골치 아프게 하던 반항적인 바빌론이 버티고 있었다.

철기, 관개, 도시 — 우라르투의 기술력

우라르투 문명: 아시리아에 정면으로 맞선 고대 산악 왕국

아시리아 국가의 약점은 소아시아와 트란스코카서스로부터 원료(특히 금속 광석)와 금속 제품을 수입하는 데 의존한다는 점이었다. 우라르투에도 자체 광산이 있었다. 게다가 장인들의 숙련된 기술 덕분에 우라르투산 강철은 아시리아산보다 우수했다. 아시리아인 스스로 트란스코카서스에서 만든 무기를 선호했으며, 우라르투 원정 때는 검과 단검, 창촉을 최대한 많이 노획하려 했다.

우라르투인은 뛰어난 철장인일 뿐 아니라 근면한 농부, 기발한 건축가, 유능한 행정관이기도 했다. 그들은 고대 동양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관개 농업의 기술을 받아들여 복잡하고 가지가 많은 운하를 수없이 팠으며, 그중 일부는 길이 70km에 달했다. 산골짜기 논밭에 물을 대어 높은 수확량을 올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막대한 식량 비축을 쌓아 수많은 병사와 관료를 부양할 수 있었다.

우라르투인은 수많은 도시를 세웠는데, 그중 예레반처럼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곳도 있다. 일부 도시는 정연한 직교형 도시 계획을 갖추었고, 그 방어벽 앞에서는 아시리아의 저명한 군사 기술마저 무력했다. 기원전 735년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툼파의 요새를 함락하지 못했다. 기원전 714년 우라르투 전토를 유린한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선왕의 실패를 기억해서인지 툼파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우라르투 신전은 당대의 다른 건축물과 상당히 달랐으며, 현지 건축 양식은 훗날 그리스 양식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우라르투 기술자와 건축가들의 발명품은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생존을 위한 북방 대이전

아르기슈티 1세와 그 아들 사르두리 2세(재위 기원전 764~735년)가 아락스강과 쿠라강 사이의 광대한 땅을 개발하기 시작하자, 우라르투인은 이런 재능들을 총동원해야 했다. 우라르투의 요충지들이 아시리아 영토와 너무 가까워 적군이 단 며칠 만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라르투에게 국가의 무기고와 곡창을 북방 지역으로 옮기는 일은 생사가 걸린 과제였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이 땅은 과수원과 포도밭으로 뒤덮였고, 산골짜기마다 활기 넘치는 도시가 자라났다.

우라르투 통치자들의 행보에서 잘못을 찾기란 어렵다. 거의 기원전 8세기 내내 그들은 결정적 회전을 피하며 힘을 비축하면서도 강대한 적을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몰아붙였다'. 그러나 상처입은 사자가 도약했고, 그 도약은 사냥꾼에게 치명적이었다. 아시리아인들은 극한의 노력 끝에 신중한 적들을 마침내 꺾었다.

멸망의 길

이 참패의 원인은 몇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기원전 745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왕위에 올랐다. 매우 활력 있는 통치자였던 그는 내분을 진압하고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아시리아는 충원된, 훈련 잘 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상비군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라르투군과 아시리아군의 첫 교전은 우라르투의 적이 더 이상 정면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야 했다. 그러나 오만함과 원대한 계획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집념이 냉철한 정치적 계산보다 강했다.

다음 왕인 루사 1세(재위 기원전 735~713년)는 더 이상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곳에서 책략으로 승리하려 했다. 우르미아 호수 일대로 아시리아군을 끌어들인 뒤 배후를 찌르려던 것이다. 그러나 사르곤 2세는 노련한 장군이었고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우라르투의 패배는 완전했다. 루사는 툼파로 도망쳐 자살했다.

아르기슈티, 사르두리, 루사는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너무 느리게 활용한 듯하다. 시간은 오히려 우라르투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기원전 8세기 말~7세기 초,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의 수많은 유목 부족이 이곳에 나타나 나라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소아시아와 트란스코카서스 인도유럽계 민족의 우라르투 주도하 통합은 흔들렸다. 반 호수의 이름을 딴 반 왕국의 마지막 왕들이 이 민족들을 세력권에 넣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스키타이는 결국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대략 기원전 640년경 우라르투 왕 사르두리 3세는 스스로 아시리아에 복속을 선언했다. 그리고 30년 뒤 우라르투는 메디아에게 정복당했다.

우라르투가 남긴 역사적 의의

약 3세기(기원전 900~600년)에 걸친 우라르투의 역사는 빛나고도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하다. 우라르투와 아시리아의 대립은 서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시리아인들로 하여금 역량을 쥐어짜내고 경제와 사회를 전시 체제로 재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우라르투인들이었다. 이 조치들은 아시리아의 전쟁 기계를 비상하게 강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기계에서 튼튼한 기반을 빼앗았다. 반 왕국의 필사적인 항쟁은 이란 고원의 젊은 민족들, 즉 메디아인과 이란인에게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소중한 숨통과 시간을 벌어주었다. 만약 아시리아 군대가 에게해의 소아시아 연안까지 닿았더라면, 고대 그리스 문명이 훗날 꽃필 수 있었을까? 아무도 확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