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인 카이사르가 혼란을 진압한 뒤, 기원전 27년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사실상의 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약 200년에 걸친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Kaiser)'는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카이사르의 탄생월은 '율리우스'에서 '7월(July)'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은 '8월(August)'로 바뀌는 등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 제국의 번영과 위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번영
오현제 시대
기원후 96년부터 180년까지 로마 제국은 긴 역사 속에서 보기 드문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시기에 재위했던 황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네르바 (재위 96~98)
- 트라야누스 (재위 98~117)
- 하드리아누스 (재위 117~138)
-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위 138~16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재위 161~180)
이들이 바로 '오현제(五賢帝)'로 불리는 황제들입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이 시기에 로마 제국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변경 지역까지 도로와 상수도를 갖춘 로마식 도시가 건설될 정도였으니, 당시 국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 제국은 도로 정비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아치 기술을 활용해 장거리 교량을 가설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응용한 건축 기술의 발달로 고층 건물 축조도 가능해졌습니다.
상수도 시설 역시 로마를 대표하는 기술입니다. 약 2000년 전에 이러한 상수도 시설이 이미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훗날 근대 도시로 성장한 런던, 파리, 빈 등도 모두 이 시기 로마 제국이 세운 도시들입니다. 로마는 도시를 통해 속주를 통치했으며, 도시의 유력자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는 대신 제국 통치에 협력했습니다.
동화 정책
로마는 고대부터 영토를 넓히고 안정시킬 때마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수를 늘려왔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주변 국가 출신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이후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제정으로 전환된 후에도 시민권 확대는 철저하게 추진되었으며, 마침내 212년 카라칼라(재위 198~217) 시대에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세수 증대를 노린 측면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은 문자 그대로 '세계 제국'이 되었습니다.
상업 활동의 활발함 덕분에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등 먼 지역과도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비단과 향신료가 로마로 유입되었습니다.
3세기의 위기
인프라가 잘 갖춰진 로마 같은 도시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속주에서 무거운 세금을 걷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층 민중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고, 반란 사례가 늘어나며 로마 제국은 점차 결속력을 잃어갔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재위 161~180) 치세 말기 무렵부터 재정난과 경제 침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군인황제 시대
235년부터 284년까지는 각 속주의 유력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황제로 세우고 원로원과 대립하는 시기였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황제가 옹립되었다가 살해되었고, 황제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사실상 내전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거대 제국의 이러한 위기를 틈타 주변 여러 민족이 로마를 노렸습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등 이민족이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사회 변화
로마 제국의 이례적인 상황에 대응하면서 사회 구조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시에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는 경제 침체를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특히 서방 도시들의 쇠퇴가 두드러졌습니다.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 도시 상류층 일부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대지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농업의 변화 — 라티푼디움에서 콜로나투스로
포에니 전쟁 이후 대규모 노예 노동에 기반한 농업(라티푼디움)이 성행했지만, 시대가 흐르고 국가가 안정되면서 값싸고 소모성 있는 노예를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지주들은 몰락한 농민들에게 주목했습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해진 뒤 농경지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었고, '빵과 서커스'로 유력자들에게 식량과 오락을 제공받던 계층이기도 했습니다.
도시의 대지주들은 이들을 소작농(콜로누스)으로 삼아 경작시켰습니다. 또한 해방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콜로누스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콜로누스는 이미 로마 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에 재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자손에게 재산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일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지주들은 강제로 부리는 대신 지대를 거두어 수익을 늘렸습니다. 이러한 농업 방식을 콜로나투스라고 부릅니다.
이 콜로나투스는 제정 말기에 본격화되었으며, 중세 유럽에서 주로 행해진 농노제의 선구적 형태이기도 했습니다.
콜로나투스가 주류가 되면 농촌에는 일자리가 많아집니다(지금과 같은 현상입니다).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도시 주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떠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도시의 공동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로마의 국력 저하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