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로마를 뒤흔든 3월 15일의 비극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폭풍 같은 속도로 권력의 계단을 올라갔고, 원로원은 서둘러 그를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독재관은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민회로부터 일정 기간 동안 전권을 위임받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권한을 종신으로 유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카이사르에게는 후세에 확실히 물려줄 왕의 칭호가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나서기 직전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돌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기원전 45년부터 그는 여러 차례 왕관에 가까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독재관과 함께 공동 집정관을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4년 2월 15일, 로마의 축제인 루페르칼리아 행사에서 그리스 왕들의 관인 디아뎀을 카이사르의 머리에 얹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군중의 야유 앞에서 카이사르는 그 관을 유피테르 신전에 바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음모와 불길한 징조

폭정을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곧 짧지만 치밀한 음모가 시작됩니다. 점술가 스푸린나는 동물 제사를 통해 흉조를 점지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전날 밤에는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꿈꾸었고, 같은 날 한 친척이 음모자 명단을 건네주었지만 카이사르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날짜: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데스의 날)

주요 인물

  •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Caius Cassius Longinus)
  • 틸리우스 팀브레 (Tullius Cimbre)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Decimus Junius Brutus Albinus)

암살의 경위

역사에 남은 그 원로원 회의는 이데스의 날, 즉 3월 15일에 열렸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하는 허위 명분으로 회의장 밖으로 유인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평생의 숙적이자 자신이 패배시켰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아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원로원 의원 틸리우스 팀브레가 그의 토가를 잡아당겨 도발했고, 이것이 곧 신호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갑자기 에워싼 원로원 의원들에게 무려 23번의 찌름을 당했습니다. 24번째 칼에 쓰러지며 그는 결정타를 가한 사람에게 그리스어로 '카이 수 테크논(Kai su teknon)'이라 말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라틴어의 유명한 문구 '투 쿼쿠에 미 필리(Tu quoque mi fili)', 즉 "너도 내 아들인가"로 번역됩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한 이는 다름 아닌 카이사르가 모든 신뢰를 보냈던 브루투스, 즉 그의 정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범행이 끝나자 60여 명의 가담자들은 시신이 출혈로 숨지도록 방치한 채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암살의 결과

안정성과 제도 존중으로 유명하던 로마 세계는 이 암살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근대화한 인물이었기에, 독재관의 죽음과 함께 로마 세계는 심각한 불안정에 휩싸입니다. 음모자들, 이른바 '해방자들(리베라토레스)'의 내전이 발발했고, 카이사르가 지명한 적법한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권좌에 오르면서 비로소 로마는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