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중세 서유럽 봉건 사회의 성립과 교회 권위의 부상

중세 유럽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질서는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와 '봉건제'라 불리는 제도 없이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15세기까지를 가리킵니다.

중세 서유럽 국가관의 특징

중세의 국가관은 현대와 비교했을 때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 정치와 종교(교회)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 국경이 명확하지 않고 모호했다
  • 황제나 왕 역시 수많은 봉건 영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시대에 따라 변화)

여기서 봉건 영주란 특정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황제나 왕이라는 칭호는 명목상의 것일 뿐, 실제로는 영주들의 대표자에 가까워 특별히 큰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유럽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봉건제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중세 서유럽 국가관의 기원과 봉건제

고대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는 오늘날에도 유럽 여러 나라의 필수 과목으로 남아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은 현대뿐 아니라 중세 유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의 제도는 다른 민족들의 제도와 결합하여 서유럽 질서의 핵심을 이루게 됩니다.

봉건제의 시작

로마 제국 말기에는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제국의 분열로 인해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상업과 도시는 쇠퇴하였고, 사회는 다시 농업 중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평민들은 자신의 토지임에도 더 이상 자기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를 겪게 됩니다. 그래서 토지를 지키기 위해 유력자에게 토지를 위탁하고 다시 임대받는 방식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베네피키움(beneficium)'입니다. 일본의 기증 장원과 비슷한 제도로,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유력자 입장에서도 생산물의 일부를 관리비로 받으면서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군사력을 유지·확장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베네피키움은 로마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 게르만족이 가져온 '종사단(retinue)' 제도가 결합하면서, 재산과 가문을 지키기 위한 봉건제가 탄생하게 됩니다.

동아시아 봉건제와의 차이점

유럽의 봉건제는 일본이나 중국의 봉건제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크게 달랐습니다.

  • 한 명의 주군이 아니라 여러 주군을 섬길 수 있었다
  • '토지를 하사한다'기보다는 '마을째로 하사한다'에 가까웠다

차이점 ① 여러 주군을 섬기는 계약 관계

유럽의 봉건제는 주군과 가신(기사) 사이의 관계가 계약에 기반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주군에게 충성 맹세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왕의 가신이 되는 경우까지 생겨나면서 국경이 더욱 모호해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은 'OO국의 영토'라기보다 '△△ 님의 영지', '□□ 님의 영지'라는 이미지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개별 영지 단위로 보면 이합집산이 잦았고, 이는 훗날 유럽의 다양성을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국가에 대한 귀속감이 약했고, 많은 기사를 거느린 대영주들은 황제나 왕에 필적하는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황제와 왕 역시 대영주들 중 하나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또한 여러 주군을 섬기다 보니 어느 한곳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영지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커져, 다른 왕이나 제후들에게 발언권을 내주는 풍토도 존재했습니다.

차이점 ② 장원은 토지뿐 아니라 사람까지 묶었다

왕·제후·기사처럼 봉건 주종 관계를 맺은 유력자들은 각자 자신의 영지를 소유하며 농민을 지배하는 영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영지·재산을 장원(manor)이라고 부릅니다.

장원 안에는 영주 직영지,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 목초지, 땔감 등을 얻던 숲, 교회 등 공동으로 사용하는 토지가 있었습니다. 제분소, 제빵 작업장, 대장간까지 갖춘 하나의 '마을'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장원에서 살던 농민들을 농노(serf)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 말기 콜로누스(colonus, 소작민)의 후손들이나 몰락한 게르만계 자유 농민들이 영주에게 보호를 구하며 농노가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농노에게는 여러 세금과 부역이 부과되었지만, 가장 억울한 것은 혼인세와 상속세(사망세)였습니다. 이 두 가지 세금이 발목을 잡는 순간, 영지 밖으로 나갈 문턱은 한순간에 높아졌습니다. 즉, 장원은 영지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영주는 왕이 파견하는 관리의 영지 출입과 과세를 거부할 수 있는 불입권(면세 특권, immunitas)과 영주 재판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장원 안에서 영주는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습니다.

이렇게 폐쇄된 장원 사회에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원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닫힌 사회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상대로 열렬한 신자들이 늘어났고, 교회의 목소리는 매우 커지게 됩니다.

교회 권위의 강화

봉건 사회에서 왕권이 미약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로마 = 그리스도교(가톨릭) 교회는 서유럽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대주교 · 주교 · 사제 · 수도원장에 이르기까지 성직자의 서열이 정해진 위계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주교와 수도원장은 왕이나 귀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장원을 소유한 영주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법(카논법)'이라는 자체 관할권을 지녔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제후들과 같은 지배 계급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본 것이 바로 황제와 왕입니다.

성직자가 아닌 사람을 성직자 자리에 임명하면 교회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쪽에서도 왕과 귀족들에게 장원을 기증받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황제와 왕의 개입을 거부하기 어려웠습니다.

본래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이 교회의 정점에 서야 했지만, 세속 권력에 포섭된 세속인들이 교회 최고위에 오를 기회가 늘어나면서 성직 매매와 같은 폐단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에 맞서 교회 측은 11세기 클뤼니 개혁을 통해 내부 개혁을 추진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 사이에는 '서임권 투쟁'(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황권은 오히려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나라의 방침을 결정할 정도로 정치적 권력이 막강해졌고,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십자군(십자군 원정)입니다. 이 십자군 원정은 중세 유럽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