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걸프전(1990~1991):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과 '사막의 폭풍' 작전

걸프전 개요

걸프전은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와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석유를 둘러싼 경제적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현대전의 성격을 바꾼 대표적인 분쟁으로 평가받는다.

전쟁의 배경

  •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끝에 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빠져 있었다.
  • 그러던 중 쿠웨이트는 OPEC 회원국들과의 협의 없이 석유 생산량을 20%나 늘리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유가가 폭락했다. 이미 경제가 위기에 처한 이라크는 석유 수입의 3분의 2를 잃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 쿠웨이트의 에미르(국가원수)가 이라크의 손실 보상을 거부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1990년 여름, 사담 후세인은 미국 대사를 만나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영토여야 한다며 침공 계획을 밝혔다. 그는 미국이 이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손을 쓸 수 있다고 확신한 뒤 쿠웨이트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미국에게 걸프전이 중요한 이유

이 전쟁은 미국에 있어 핵심적인 전략적 사안이었다. 쿠웨이트에는 세계 석유 매장량의 약 9%가 매장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군사 기지를 구축하면 아랍 산유국들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이를 페르시아만에 미국 세력을 확립할 명분으로 삼았다.

주요 인물

  • 조지 H. W. 부시 — 당시 미국 대통령
  • 사담 후세인 — 이라크 대통령
  • 노먼 슈워츠코프 — 다국적군 사령관
  • 콜린 파월 —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

전개 과정

1990년 7월 협상이 결렬되자, 이라크는 같은 해 8월 2일 거의 저항 없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국제사회는 이 침공이 석유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즉각적으로 강력히 반응했다.

사담 후세인이 사우디아라비마저 침공할 의도라고 판단한 미국은 신속히 국제 연합군을 규합했다. 명분은 이라크에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전쟁'이었다.

1990년 8월 6일, '사막의 방패(Desert Shield)' 작전이 개시되었다. 9월부터 11월까지 30여 개국(영미권·유럽·아랍 국가)이 이라크 국경에 약 60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반면 이라크군은 장비가 열악한 50만 명에 불과했으며, 연합군은 미국의 슈워츠코프와 파월이 지휘했다. 서방 언론의 대규모 선전 역시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군 공군은 이라크 본토와 이라크군을 대대적으로 공습했고, 단 43일 만에 8만 8천 톤의 폭탄이 투하되어 심각한 민간 피해가 발생했다.

2월 23일, 연합군 지상군은 저항 없이 이라크 영내로 진입했다.
2월 26일,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부시 대통령은 연합군이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시아파들이 이라크의 권력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중단시켰고, 이는 국제 여론을 크게 놀라게 했다. 사담 후세인은 오히려 살아남았고, 더 나아가 연합군은 자신들이 불러온 반란을 후세인이 진압하는 것을 묵인했다.

결과와 영향

  •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과 시아파에 대한 학살을 시작했다.
  • 이라크는 경제 제재(엠바고)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매일 폭격을 당했으며, 이라크의 약화는 걸프 지역 아랍 산유국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갔다.
  • 페르시아만에는 대규모 영미권 군사 기지가 상주하게 되었다.
  • 사담 후세인은 점차 이슬람주의 세력에 접근했고, 지역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어 2001년 9·11 테러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