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감옥 습격의 배경
1789년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해였습니다. 재정 위기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마침내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됩니다.
삼부회 소집과 국민제헌의회
-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프랑스를 덮친 경제 위기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베르사유에서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성직자 신분, 귀족 신분, 그리고 제3신분(평민)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제헌의회'라고 선언했습니다. 삼부회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판단한 국왕은 크게 불쾌해했고, 왕실 군대가 개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리에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 6월 20일: 국민제헌의회는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맹서'입니다.
혼란의 시작, 1789년 7월 12일
- 파리 시민들은 국왕의 재정 총감독관인 자크 네케르가 파면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네케르는 프랑스 민중에게 매우 인기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파면은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민심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 정오 무렵, 변호사이자 언론인인 카미유 데물랭이 군중 앞에 서서 국왕 정부에 맞서 무기를 들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시위가 파리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 튈르리 궁전에서는 기병 연대가 군중을 향해 돌격하여 여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 밤사이, 파리로 들어가는 50개의 관문 중 무려 40개가 불태워졌습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당일

주요 인물
- 루이 오귀스트, 즉 루이 16세 (프랑스 국왕)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카미유 데물랭
- 자크 네케르
-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
습격의 전개 과정
1789년 7월 14일 화요일 오전 10시, 파리 시민들은 앵발리드(Invalides)에서 총기를 탈취했습니다. 이들은 이어서 바스티유 감옥에 저장된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바스티유의 총독인 베르나르 르네 조르당 드 라우네(Bernard-René Jordan de Launay)는 폭도들에게 대포와 화약을 넘겨주라는 요구를 몇 차례에 걸쳐 거부했습니다.
폭발음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병사들이 반격하며 백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공성전은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끝내 저항을 포기한 바스티유 수비군은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희망과 함께 항복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폭도들이 감옥에 몰려들자 수비 병사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했습니다. 생존자들은 시청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길목에서 드 라우네 총독은 살해당하고 그의 머리는 창 끝에 꽂힌 채 행진에 올랐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1789년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이미 국가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폭도들이 감옥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는 단 7명의 수감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노린 것은 감옥 그 자체가 아니라 왕권 전제주의라는 상징이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의 역사적 의미와 결과
- 바스티유 습격은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 전례 없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 7월 14일은 프랑스 정치사의 급진적 전환점을 의미하며, 같은 해 8월 26일에 발표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 다음 해인 1790년 7월 14일에는 사건 1주년을 기념하는 '연방제 축일(Fête de la Fédération)'이 열렸습니다. 이후 1880년, 이 두 가지 기념행사를 기리기 위해 7월 14일이 프랑스의 국경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