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홀로도모르(Holodomor): 스탈린이 자행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잊혀진 대량 학살

홀로도모르(Holodomor)는 '굶주림으로 죽음'이라는 뜻을 지닌 우크라이나어 단어로, 1931년부터 1933년 사이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처럼, 홀로도모르는 스탈린이 이끈 소련 공산 정권이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상대로 벌인 집단학살(genocide)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홀로도모르(Holodomor): 스탈린이 자행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잊혀진 대량 학살

스탈린의 경제 정책에서 비롯된 참극

홀로도모르의 참상은 1928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핵심 조치 중 하나는 소련 전역의 곡물 생산을 '강제 징발(compulsory requisition)'이라는 관료적 장치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농민들이 생산한 잉여 농산물의 상당 부분을 국가에 낮은 가격으로 강제 납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는 농업 재산의 강제 집단화(collectivization) 정책이 뒤따랐고, 농장 운영권은 완전히 소련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가장 강하게 저항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조치에 가장 강하게 저항한 소련 공화국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문화적 자율성과 강한 민족 정체성은 러시아 소련 당국의 야망을 좌절시키는 요소였습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강제 집단화와 곡물 강제 징발에 반발해 들고일어나자, 스탈린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가혹한 조치를 우크라이나에 내리기에 이릅니다.

반(反)우크라이나 캠페인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태도가 공산주의 이념에 얼마나 '해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반(反)우크라이나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펼쳤습니다. 먼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굴욕 조치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모욕적인 재판과 각종 조롱에 시달렸습니다. 동시에 장기적으로 반소 세력으로 번질 수 있는 조직의 싹을 미리 잘라내는 작업도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에 이어 스탈린은 마침내 농민 계층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곡물 할당량과 극심한 기근

1929년부터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는 소련 중앙정부에 바칠 곡물 생산·납부 목표가 가혹할 정도로 부과되었습니다. 그 기준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스스로 먹을 몫조차 포기해야만 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고, 결국 실질적으로 굶주림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생산물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감자 하나를 먹거나 옥수수 이삭을 따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거리와 들판을 덮은 죽음

점차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죽음이 확산되었습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사망자가 너무 많아 시신들이 거리와 들판 곳곳에 방치되었고, 썩어가는 시신의 악취가 광대한 지역을 뒤덮었습니다. 역사가 토머스 우즈(Thomas Woods)는 이 참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1933년, 스탈린은 이미 굶주림으로 대량 사망 직전에 몰린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생산·징수 목표를 부과했습니다. 이후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독자에게 맡기겠지만, 시신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죽음의 강렬한 냄새가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정신 이상 사례, 심지어 식인 사례까지 문서로 잘 남아 있습니다." (토머스 우즈, 「우크라이나의 기근 – 잊혀진 국가 범죄 중 가장 큰 범죄」, 미제스 연구소 브라질)

사망자, 최대 1,400만 명?

이 3년간의 사망자는 약 5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 잔혹한 경제 정책이 남긴 후유증과 강제 노동에 동원된 뒤 현지에서 숨진 우크라이나인들까지 고려하면, 희생자 수는 1,400만 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 클라우디오 페르난데스(Me. Cláudio Fernandes)

*이미지 출처: Shutterstock, IgorGolovni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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