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인도 신항로를 둘러싼 유럽의 경쟁
15세기 유럽 열강들은 아랍 상인과 오스만 제국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인도와 그 전설적인 부에 직접 닿을 수 있는 항로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화려한 귀환은, 남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 개척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온 포르투갈에게는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1497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바스코 다 가마에게 마침내 인도행 항로를 발견하고 스페인의 발견에 맞서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항해 기간: 1497년 ~ 1503년
주요 인물
- 바스코 다 가마: 포르투갈의 항해사이자 탐험가로, 유럽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최초의 해상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 '행운왕'이라 불린 포르투갈 국왕으로,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입니다.
항해 경과
첫 번째 항해(1497~1499): 인도 신항로의 발견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7월 8일, 배 4척과 선원 200명을 이끌고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발했습니다.
긴 우회 항해 끝에 선원 일부를 잃었지만, 원정대는 같은 해 11월 희망봉을 돌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에 기항하며 소규모 교역을 벌였고, 그 지역의 계절풍에 밝은 사람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당시 아랍 상인들은 이미 이 해역에서 활발히 교역하고 있었습니다.
1498년 5월, 바스코 다 가마는 마침내 인도의 칼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랍인과 베네치아 상인들이 교역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음모가 얽힌 가운데, 그가 가져온 물품들이 인도 측의 관심을 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칼리컷과의 교역 권리를 확보하고 8월에 귀항길에 올랐습니다.
1499년, 그는 처음 출발했던 200명 중 겨우 50명만 남은 채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원정 자체는 상업적으로 성공이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제독'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인도에 대한 각종 전설을 만들어 퍼뜨렸는데, 특히 그곳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이야기를 유포했으며, 자신이 인도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항해(1502~1503): 식민지 건설과 폭력
인도가 부로 가득하다고 마누엘 1세를 설득한 바스코 다 가마는 이번에는 약 2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식민지 건설 임무를 띠고 다시 출항합니다. 그는 모잠비크에 최초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이번 항해에서 바스코 다 가마는 극심한 폭력성을 드러내며, 경쟁 관계에 있던 아랍 및 이집트 상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칼리컷에 재차 도착한 그는 도시를 굴복시키기 위해 사흘간 포격을 퍼부었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영향과 결과
- 바스코 다 가마의 폭력과 탐욕은 마누엘 1세의 분노를 샀고, 국왕은 그를 공개적으로 불신임했습니다.
- 그러나 그가 연 새로운 향료 무역로는 비록 활용 빈도는 낮았지만, 포르투갈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결정적 발판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첫 식민 제국을 건설했고, 향료와 부, 그리고 노예를 본국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