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천년의 오류를 뒤집다 — 혈액 순환을 증명한 윌리엄 하비

천년의 오류를 뒤집다 — 혈액 순환을 증명한 윌리엄 하비

왕 찰스 1세 앞에서 작은 동물의 심장을 보이며 순환 이론을 설명하는 하비. 어니스트 보드(1877~1934) 그림 • WIKIMEDIACOMMONS

1628년, 영국의 의사이자 해부학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동물의 심장과 혈액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했다. 70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4개의 삽화가 담긴 이 책에서 그는 인체 내 혈액 순환을 논증했고, 고대 이래 의학 교과서가 그대로 따라온 잘못된 학설을 폐기시켰다.

동양이 먼저 알고 있던 순환

지식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동양의 과학은 유럽보다 수백 년 앞서 있었다. 기원전 2600년경에 쓰인 중국 의학의 핵심 경전 중 하나는 "몸의 모든 피는 심장의 지배를 받아 원을 그리며 흐르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3세기의 아랍 의사 이븐 안나피스(Ibn an-Nafis) 역시 소순환, 즉 폐순환을 이미 서술한 바 있다.

서양에서는 2세기 그리스 의사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의 교리가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에 의해서야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맥혈이 폐를 통과하며 정화된 뒤 심장으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갈레노스 전통에 대한 깊은 두려움 때문에, 스페인 출신의 이 철학자이자 의사는 그러한 순환이 거치는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사형수 부검으로 쌓은 증거

수 세기 동안 내려온 갈레노스의 학설에 따르면, 위와 장에서 흡수된 음식물은 간에서 변형되어 피, 곧 모든 조직을 낳고 기르는 '검은 물질'이 된다. 혈액이 되돌아온다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정맥은 피를 운반하고 동맥은 비어 있다고 여겨졌는데, 동맥이라는 이름 자체가 '공기를 운반하는 것'이라는 뜻의 arteria에서 왔다. 끊임없이 소모되는 피는 끊임없이 생산되어야 했고, 피가 과잉되면 전체 대사의 균형이 깨지므로 사혈(放血)로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천년의 전통, 곧 경험과 완전히 동떨어진 학설에 맞서 안드레 베살리우스(1514~1564) 같은 해부학자들은 장기가 훨씬 복잡하게 작동하며, 몸이 하나의 공장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폴크스턴에서 태어난 윌리엄 하비는 이 플랑드르 의사의 회의정신과 연구 기법에 큰 영향을 받았다. 뛰어난 재능 덕분에 케임브리지의 명문 학부에서 공부했고, 파두아 대학교에서 수련을 마쳐 160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그는 대학 강의에 헌신했다. 매주 이론 강의를 진행했고, 매년 처형된 죄인의 시신 6구를 부검했다. 여러 병을 앓던 그는 1651년 라우다넘(아편 시럽)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6년 뒤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순환의 엔진, 심장

윌리엄 하비는 의학 지식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반복된 실험에서 도출된 결론만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원칙을 저서의 서문에 명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인체를 해부했고 40여 종의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하비는 인체에 이중 혈액 순환, 즉 정맥(장기에서 심장으로 피를 실어 옴)과 동맥(피를 온몸에 공급함)을 통과하는 순환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 순환의 동력원이 간이 아니라 심장에 있음을 밝혔다.

또한 하비는 혈액이 항상 일정한 양으로 영원히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갈레노스 이론에 기반한 '영구 생산' 가설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심장이 한 시간에 내보내는 혈액의 양(약 270리터)이 성인 남성 체중의 세 배에 달한다는 것을 계산해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수 없는 양이었던 것이다. 이 관찰은 훨씬 적은 양의 피가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가설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심장의 박동이 피를 동맥을 통해 내보내고, 정맥을 통해 출발점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는 사혈(정맥 절개), 동맥류의 박동, 관자놀이·목·손목에서의 맥박 측정 등을 바탕으로 관찰을 진행했다. 순환 현상은 뱀에 물린 상처처럼 특정 부위에 국한된 감염이나 독이 온몸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간의 기능, 호흡의 역할, 그리고 신체 기관이 피를 소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양을 공급받는가 하는 문제 등은 답하지 못했다.

하비의 발견은 또 한 가지 불완전했다. 그는 정맥(매우 어둡고 산소가 없는 '갈레노스식' 피가 흐름)과 폐를 거쳐 산소가 실린 진홍색 피를 실어 오는 동맥 사이의 연결을 입증하지 못했다. 해부학자가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에야 마르첼로 말피기(1628~1694)가 현미경을 사용해 정맥계와 동맥계를 잇는 고리, 곧 아주 가는 혈관인 모세혈관을 발견하면서 이 연결이 드러났다.

태양왕도 설득당하다

이러한 진보는 당시의 전통적 분위기와 충돌했다. 저서 출간 후 하비는 성공회 성직자들과 의사들의 고발에 시달렸다. 그의 개인 진료는 적개심을 샀고, '치료사'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대륙에서도 그의 발견에 대한 저항이 울려 퍼졌고, 동시대 저명한 지식인들이 입장을 밝혔다. 몰리에르와 보일로는 영국인의 학설을 지지했지만, 데카르트는 처음에는 혈액 순환 개념을 받아들였다가 결국 심장의 동력 기능 이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루이 14세는 하비 사상의 학문적 가치를 인정했다. 1672년 태양왕은 혈액 순환이 파리 왕립약초원(훗날 자연사박물관)에서 의사 피에르 디오니스가 강의하는 주제가 되도록 결정했다.

역설적으로 하비는 응용 의학에서는 크게 혁신적이지 않았다. 그는 염증, 열병 등 여러 질환, 심지어 출혈에 대한 전통 치법인 사혈을 지지했다. 그의 저서 출간은 절개 부위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상처에서 떨어진 곳에서 절개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쪽 몸에서 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하비는 치료법에서 더 대담하지 않았고 수혈의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리처드 로워(1631~1691)가 이끈 최초의 수혈 시도는 우연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영국 외과의사가 개와 양의 피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의학 실무를 지배한 보수주의는 하비 사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지속되었다. 학문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루이 14세조차 전통 요법에 계속 의존했다. 임금은 2,000번의 설약, 수백 번의 관장, 38번의 사혈을 받았다. 해부학과 생리학의 발전이 실무에 적용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린 것이다.

더 읽을거리
J.-L. 비네, 『피와 인간(Blood and Men)』, 갈리마르, 2001.

연표

1543 — 베살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서 갈레노스의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해부학적 비전을 제시하다.
1578 — 윌리엄 하비가 폴크스턴에서 태어나다. 뛰어난 재능으로 최고의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다.
1628 — 하비가 혈액 순환 작용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다.
1657 — 하비가 세상을 떠나다. 15년 뒤 루이 14세의 아카데미에서 혈액 순환이 강의되다.
1661 — 말피기가 현미경과 하비의 이론을 통해 정맥과 동맥의 연결을 증명하다.

마녀사냥을 막은 의사

하비의 명성은 1618년부터 1649년까지 왕실 의사 자리를 안겨주었다. 특히 제임스 1세의 건강을 살폈다. 궁정에서 그는 마녀사냥 문제와 직접 맞닥뜨렸다. 여러 재판에서 국왕이 임명한 감정인으로서 하비는 마녀로 고발된 수많은 여성의 목숨을 구했다. 그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두꺼비에 악마가 깃들었다는 소문의 속임수를 폭로하기도 했다.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메스로 그 동물을 열어 보이고, 그저 평범한 양서류일 뿐임을 증명한 것이다.

동물 실험

1628년 하비는 『동물의 심장과 혈액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했다. 이 책은 다양한 종의 동물 생체 해부 실험을 기술하고, 동물 순환계의 메커니즘을 상세히 묘사하며 이를 인간에게 확장 적용했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피

하비는 피가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돌아오며, 정맥 판막이 이 경로를 강제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판막은 피가 한 방향으로만, 즉 신체 말단에서 심장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판막을 쉽게 열지만, 반대 방향의 움직임은 판막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