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소련의 우주인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여성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녀는 1963년 보스토크 6호(Vostok 6)에 단독 탑승하여 약 71시간 동안 우주에 머무르며 지구를 48회 궤도 선회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 공로로 소련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출생과 어린 시절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937년 3월 6일 소련 볼쇼예 마슬렌니코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평범한 집안이었으며, 아버지 블라디미르 테레시코프는 트랙터 운전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겨울 전쟁에 징집되어 카렐리아 지역 전투 중 전사했고, 당시 발렌티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어머니 옐레나 테레시코바는 세 자녀를 데리고 야로슬라블로 이주하여 방직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발렌티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며 교육 기회를 얻었고, 18세부터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인이 되기까지
1950~60년대 소련과 미국은 '우주 경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기술 패권 다툼을 벌였습니다. 두 강대국은 우주 탐사 분야에서 누가 더 앞서는지 겨루었고,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최초의 생명체와 인간의 우주 진출 등 연이은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1960년대 초, 소련은 새로운 이정표로 '여성 최초의 우주 비행' 계획을 세웠고, 이것이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에게 운명 같은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방직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동시에 아마추어 낙하산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소련 청년 공산당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테레시코바는 소련의 우주인 선발 프로그램에 지원했습니다. '코스모노트(cosmonaut)'란 소련에서 우주인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약 5,000명이 지원했고, 철저한 선발 과정을 통해 후보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처음 400명의 여성이 선발된 뒤 최종 5명만 남았습니다. 테레시코바 외에 발렌티나 포노마료바, 타티야나 쿠즈네쇼바, 잔나 요르키나, 이리나 솔로비요바가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선발 기본 조건은 30세 미만, 신장 170cm 미만, 체중 70kg 미만이었습니다. 테레시코바는 이 조건을 충족했을 뿐 아니라, 엄격한 시험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선발 및 훈련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포함되었습니다.
- 고립(격리) 내성 시험
- 감압 시험
- 원심분리기 시험
- 항공기 조종 훈련
- 급격한 온도 변화 적응 시험
최종 결정에 따라 테레시코바와 포노마료바가 각각 보스토크 5호와 6호의 임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포노마료바가 다른 인물로 교체되면서 테레시코바는 보스토크 6호에 배정되었습니다. 포노마료바가 페미니즘 성향 때문에 탈락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보스토크 6호 임무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최종 선발은 당시 소련 공산당 제1서기이자 국가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의 재가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는 시험 결과가 우수했던 점에 더해, 농부의 딸로 공장에서 일하고 당 활동에 헌신한 테레시코바야말로 '이상적인 소련 여성'의 상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레리 비콥스키가 탑승한 보스토크 5호가 1963년 6월 14일 발사되었고, 이틀 뒤인 6월 16일 보스토크 6호가 발사되었습니다. 테레시코바의 콜사인은 '차이카(갈매기)'였습니다. 그녀는 약 71시간에 걸친 임무 동안 지구 주위를 48회 궤도 선회했습니다.
귀환 과정에서 테레시코바는 고도 6,000m 상공에서 캡슐에서 사출되어 낙하산으로 착륙했습니다. 낙하산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였지만, 임무 기간 내내 헬멧의 압력으로 인한 메스꺼움과 두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위기도 있었습니다. 우주선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겨 캡슐이 지구 궤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테레시코바는 수동 조작으로 프로그램을 수정해 귀환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착륙 시점에는 바람 문제로 호수 근처에 내려앉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착륙 지점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영토였고, 그녀는 근처에 살던 농민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테레시코바는 현지인들과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후 프로토콜상 의료 검사를 먼저 받았어야 한다며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임무를 마친 뒤 테레시코바는 소련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쿠바와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초청 방문을 받았으며, 소련 정부의 최고 영예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우주 비행 이후
우주 비행 이후 테레시코바는 재차 우주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료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사망 이후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정책 때문이 컸습니다. 그녀는 우주 프로그램에 계속 관여했지만, 1969년 소련 정부는 신규 우주인 파견을 중단했습니다.
소련은 1982년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가 소유즈 T-7호를 통해 살류트 7호 우주정거장에 도착하면서야 비로소 19년 만에 여성을 우주에 보냈습니다. 미국은 1983년 샐리 라이드가 챌린저호에 탑승하며 최초의 여성 우주인을 배출했습니다.
테레시코바는 이후에도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 공산당 내 요직을 맡았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정치 경력을 이어갔고, 2011년 러시아 연방 하원에 해당하는 연방 두마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삶
1963년 테레시코바는 동료 우주인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딸 옐레나는 우주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1982년 이혼했고, 같은 해 테레시코바는 외과 의사 율리 샤포슈니코프와 재혼하여 남편이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