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티지 판화에 담긴 알리 베이의 초상 • 위키미디어 커먼스
히즈라력 1221년 두알키다 달, 서기 1807년 1월. 한 명의 순례자가 메카 시내에 들어섰다. 불신자의 출입을 사형으로까지 금하는 이곳은 이슬람 최후의 성지다. 그는 고대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알리 베이'. 병들어 몸져누운 그는 들것에 실린 채 특별히 입성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이 여행자의 진짜 이름은 알리 베이가 아니며, 아바스 왕조의 후손도 아니고, 심지어 무슬림조차 아니었다.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를 배회하던 이 불신자는 '도밍고 바디아(Domingo Badia)'라는 이름의 스페인인이었다.
모로코의 이중 첩자
도밍고 프란시스코 호르헤 바디아 이 레블리흐는 1767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말라가에서 전쟁 회계관으로 근무했는데, 도밍고는 그곳에서 '조국의 벗 경제학회' 모임에 참여하며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786년에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1794년 코르도바로 발령받아 왕립 담배 세금 관리국 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웅장한 안달루시아의 이슬람 유적에 매료된 그는 아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기구(氣球) 실험에 재산을 탕진한 뒤 1799년 마드리드로 떠나 카스텔프랑코 공작의 사서로 일하게 되었는데, 봉급은 적었지만 방대한 학술서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탐험가 멍고 파크의 『아프리카 내륙기행』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지의 땅 탐사에 대한 열망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스페인 정부에 북아프리카 과학 탐사대 지원을 요청했고, 총리 마누엘 고도이는 이 계획을 모로코 술탄 물라이 슬리마네에게 접근할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목표는 스페인이 모로코를 보호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바디아에게는 모로코 내부에서 반란을 부추겨 스페인의 침공 명분을 만들라는 밀명이 내려졌다.
1803년, 바디아는 여정에 나섰다. 그는 유럽에서 교육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바스 왕조 후손, 시리아 왕자 '알리 베이'로 신분을 위장했다. 뛰어난 학식과 후한 선물 덕분에 그는 빠르게 모로코 술탄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물라이 슬리마네는 어떤 협약도 거부했고, 오히려 반란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권위를 굳히면 스페인을 공격하고 싶다는 야심까지 드러냈다. 바디아는 훗날 국경 분쟁 발발로 직전에 좌절된 대규모 음모를 자신이 조직했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상당한 회의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여졌다.
메카로 가는 길
바디아는 1805년 10월 모로코를 떠났다. 트리폴리, 키프로스, 이집트를 거친 뒤, 당시 오스만 칼리프의 통치 아래 있던 메카 순례를 결심한다. 1807년 1월 13일 성지로 향한 그는 이틀 뒤 도착에 성공했다.
메카에 도착한 바디아는 진짜 무슬림 신자처럼 행동했다. 깊은 밤, 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는 즉시 순례 의식을 수행하겠다고 고집했고, 카바 성소를 일곱 바퀴 도는 타와프를 감행했다. 다음 날,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가 그에게 문을 열었고 잠입자는 드디어 그 내부를 탐방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메카의 샤리프 갈리브 에펜디를 알현했는데, 샤리프는 그의 출신과 서방에서의 행적을 캐물었다. 하지만 아랍어 구사가 완벽했던 바디아는 별 어려움 없이 질문을 넘겼다.
1월 24일에는 성소가 다시 열렸지만, 이번에는 여성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5일 뒤, 그해 마지막으로 문이 열린 날은 성소 세척 의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이 의식은 샤리프가 부족장들과 흑인 노예 몇 명과 함께 직접 수행하는 것으로, 바디아는 이 행렬에 동행하라는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았다.
와하브파의 권력 장악
2월 3일, 새로운 청교도 운동을 따르는 와하브파 군대가 메카에 도착했다. 6천 명의 병사들은 순례자로 위장하고 자신들의 의식을 행했지만, 총과 단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바디아의 이 시기 기록은 다소 혼란스럽다. 그는 이들이 도시를 점령하러 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와하브파는 이미 1803년에 메카를 점령해 갈리브를 폐위시킨 바 있다. 다만 갈리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1805년 그의 복직을 허용했던 것이다.
바디아가 도착한 두 해 뒤, 갈리브는 여전히 도시를 통치하며 3천 명의 무장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와하브파가 엄금하는 흡연을 몰래 즐기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갈리프는 어디까지나 와하브파 지도자 에미르 사우드의 단순한 속국 군주였다. 2월 26일, 사우드는 직접 권력을 장악하고 샤리프의 군대를 해산했으며, 오스만 술탄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금요 예설에서 술탄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금지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2월 16일, 바디아는 무함마드가 마지막 설교를 했다는 아라파트 산으로 향했다. 그는 전통에 따르면 대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에게 처음 나타났다는 '빛의 산', 제벨 엘 누르 근처를 지났다. 원래 순례자들은 산 정상의 작은 성역에서 기도했지만, 와하브파는 이를 미신으로 여겨 건물을 파괴하고 산기슭에 위병을 세워 놓았다. 바디아는 메디나의 예언자 무덤을 참배하며 순례를 마무리하려 했으나, 우상 숭배라고 규탄하는 와하브파가 무력으로 이를 막았다.
같은 이유로, 매년 무함마드의 무덤에 융단을 바치러 오던 다마스커스의 순례 상단도 되돌려 보내졌다. 그럼에도 바디아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대화를 나눈 와하브파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현지인이든 순례자든 그들의 이름을 듣고 몸서리치지 않는 이는 없으며, 심지어 와하브파끼리도 그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만 발음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고, 가능한 한 그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삼간다.”
프랑스로의 망명
성지, 시리아, 튀르키예를 방문하고 유럽 전역을 횡단한 바디아는 1808년 5월 9일 바욘에 도착했다. 당시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왕위를 넘겼고, 나폴레옹은 다시 그 자리를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긴 참이었다. 카를로스 4세는 바디아를 알현하고 새 정권에 충성하라고 권유했고, 몰락한 군주의 말을 그는 받아들였다. 코르도바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던 바디아는 1813년 스페인인들이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축출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1814년, 바디아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여행기를 초판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곧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번역되었지만, 모국어인 스페인어 번역본은 1836년에야 나왔다.
루이 18세가 즉위한 프랑스에서 스페인 출신 여행자의 인생은 순풍을 탔다. 그는 프랑스 국籍을 부여받고 원수(元帥) 격의 대우까지 받았으며, 파리 문화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1815년,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그는 프랑스 정부에 다시 메카를 방문한 뒤 아프리카 전역을 횡단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했고, 이 프로젝트는 승인되었다. 1818년 1월, '알리 아부 우스만'이라는 가명으로 출발한 바디아는 7월 다마스커스에서 이질에 걸렸고(오랫동안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없다) 8월에 세상을 떠났다.
바디아가 메카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은 아니었다. 1503년의 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디 바르테마, 1607년의 오스트리아인 요한 빌트, 1680년의 영국인 조지프 피츠가 그보다 앞섰다. 그러나 메카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남기고,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으며, 카바 내부를 기록한 최초의 인물은 바디아였다. 이후 메카를 찾은 수많은 탐험가들은 결국 그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간 셈이다.
더 읽기
『이슬람의 땅을 걷은 스페인 여행자, 알리 베이』(Ali Bey, a Spanish traveler in the land of Islam), C. 푸셰, L'Harmattan, 2012.
연표
1767년
도밍고 바디아가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랍 문화와 탐사 여행에 끌렸다.
1803년
바디아는 알리 베이로 신분을 위장하고 스페인 정부의 밀명을 받아 모로코로 향했다. 이곳에서 1805년 메카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1807년
바디아, 메카 입성에 성공하다. 1808년 귀국한 뒤 스페인 국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섬겼고, 1813년 그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1814년
프랑스 망명 중 여행기를 출간했고, 아프리카 탐사 항해를 위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1818년
바디아는 여행의 목적지였던 아프리카에 닿기 못한 채 다마스커스 근교에서 생을 마감했다.
엄격한 종교개혁 세력, 와하브파
1774년, 설교자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 와하브는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원점 회귀를 통해 이슬람을 개혁하겠다고 선언하며 와하브파를 탄생시켰다. 그는 강력한 부족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의 지원을 얻어 정복 전쟁에 나섰고, 왕조의 3대 군주 '대(大) 사우드'는 메카를 손에 넣었다. 그의 후손들은 훗날 현대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