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맞선 '유럽 최초의 빨치산'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흔히 그리스의 저항 영웅 마놀리스 글레조스를 떠올리지만, 실제 최초의 유격대원은 폴란드의 기병 장교 헨리크 도브샨스키(Henryk Dobrzański)였습니다. 그는 1939년 폴란드가 항복한 뒤에도 끝내 무기를 내려놓지 않고, 전사하는 순간까지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삼국 분할 속에서 자란 애국자
도브샨스키는 1897년, 당시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폴란드 지역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국토가 분할 점령되던 시절, 그는 어린 나이부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강한 애국심을 키웠습니다. 15세에 이미 폴란드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7세의 도브샨스키는 오스트리아가 조직한 폴란드 군단에 자원입대했습니다. 독립을 약속받은 폴란드 병사들은 최대의 적인 러시아군과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는 제2울란(창기병) 연대에 배속되어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국으로 승인되자, 그는 즉시 새로 창설된 폴란드군에 입대했습니다.
기병 장교이자 올림픽 선수
독립 직후의 폴란드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도브샨스키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그리고 소련 볼셰비키와의 전쟁에 차례로 참전했습니다. 그의 용맹함은 화려한 훈장으로 인정받았는데, 폴란드 최고 무공훈장인 군사훈장(비르투티 밀리타리)과 군공십자장 4회를 수훈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군에 남았습니다. 특히 뛰어난 승마 실력을 지녔던 그는 1928년 올림픽에 폴란드 대표로 출전해 4위에 올랐으며, 승마 경기를 통틀어 무려 금메달 22개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1939년 도브샨스키는 제110예비기병연대(SI)의 부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징집병으로 구성된 부대였지만, 독일군의 기습적인 진격 때문에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인력과 물자 모두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연대는 독일 침략군과 소련 침략군 양쪽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는 붉은 군대를 상대로 한 그로드노 전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습니다. 사흘간의 격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연대는 리투아니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바르샤바 방면으로 이동했습니다.
포위망을 뚫고
행군 도중 그는 소련군에게 포위되었지만, 혈전 끝에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연대장 다브로프스키 중령은 부대 해체를 결정했지만, 180명의 병사는 "계속 싸우겠다"며 남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바르샤바로 향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9월 27일 폴란드 수도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폴란드 병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첫째, 싸움을 포기한다. 둘째, 루마니아나 헝가리를 거쳐 탈출한다. 셋째, 폴란드 영토 안에서 전쟁을 계속한다.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자들
다브로프스키 중령은 약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10월 1일 부대는 비스툴라 강을 건넜고, 그곳에서 독일군과 충돌했습니다. 한편 도브샨스키 휘하의 병력은 켈체 지역에 잔류해 계속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1940년 봄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인 10월 6일, 코크 전투를 끝으로 폴란드군 마지막 정규 부대가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도브샨스키와 그를 따르는 11명의 병사만은 끝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일부는 직접 그의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유럽 최초의 유격 부대
1939년 11월, 도브샨스키는 폴란드 지하 저항 조직과 접촉해 토카르젭스키 장군을 만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4일 부대 해체 명령이 내려왔을 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떠나고 싶은 병사들은 스스로 선택하도록 보내주었습니다. 결국 그의 곁에는 30명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곧 지역 청년들과 탈출해 온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부대는 급성장했습니다. 1940년 3월에는 무려 300명의 남성과 여성 1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재정비된 부대는 독일군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 기습하는 과감한 유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의 보복과 영웅의 최후
독일군의 반응은 잔혹했습니다. 첫 번째 국면에서 독일군은 도브샨스키 부대를 지원한 마을들을 불태웠고, 7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처형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폴란드 게릴라들을 은밀하게 추적했습니다.
1940년 4월 30일, 도브샨스키와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 분견대는 독일군의 매복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의 부대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프랑스가 무너져 가는 와중에도 6월 25일까지 저항을 이어갔고, 결국 그날 부대는 해체되었습니다.
남겨진 이야기들
한편 연대장 다브로프스키 중령은 결국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카틴에서 수천 명의 폴란드 장교들이 학살되던 바로 그 시기에 민스크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도브샨스키의 생애는 1973년, 폴란드가 공산 정권 하에 있던 시절에도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국민적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유럽 최초의 빨치산입니다. 이 칭호가 마놀리스 글레조스에게 잘못 돌려졌지만, 물론 이것이 글레조스의 영웅적 행위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헨리크 도브샨스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