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아(Dacia): 고대 중앙유럽의 역사적 지역
다키아는 중앙유럽에 위치했던 고대 지역으로,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와 역사적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오늘날 루마니아 중북부·서부)의 상당 부분을 아울렀습니다.

다키아족의 기원과 문화
다키아족은 본래 도나우 강 남쪽과 산맥 북쪽에 영토를 두고 있었으며, 이들의 땅이 로마 속주가 된 이후에는 북쪽과 동쪽으로 더 넓은 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다키아족은 트라키아 계통 부족 출신으로, 이 지역의 트라키아 후계 민족 가운데 게타이(Getae)와 가장 유사했습니다. 실제로 두 집단 간의 유사성 때문에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양자를 모두 게타이라 불렀고, 반면 로마인들은 이 모든 주민을 다키아인이라 지칭했습니다.
다키아인들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노예 시장에서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그리스인들과 활발히 교역하며(주로 포도주를 수입) 그리스 화폐를 사용했습니다. 다키아인들은 트라키아 방언을 사용했지만, 인접한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를 지녔습니다. 특히 신 잘목시스(Zalmoxis)에 대한 숭배와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특징짓는 요소였으며, 기원전 4세기에 침입해 온 켈트족과도 문화적으로 달랐습니다.
계급 사회와 번영한 경제
기원전 112년, 109년, 75년에 로마군과 충돌하며 동맹을 형성하던 시기, 다키아 사회는 이미 귀족층과 평민층이라는 두 개의 뚜렷한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귀족층은 귀족과 사제 계급으로 구성되었고, 평민층은 군대의 주력이자 농민과 장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평민층의 주된 생업은 농경과 목축이었으며, 다키아인들은 트란실바니아의 풍부한 은·철·금 광산에서도 일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발견되는 외국 화폐의 수가 많다는 사실은 다키아가 상당한 규모의 대외 무역을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부레비스타 왕과 왕국의 분열
기원전 60~50년경 부레비스타(Burebista) 왕은 왕국을 통합하고 확장하여 지역 강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흑해 북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굴복시켰고, 서쪽으로는 티서 강 너머까지, 북쪽으로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까지,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을 건너 베오그라드 너머 지역까지 국경을 넓혔습니다. 부레비스타는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에게 지원을 제안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다키아 왕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해 암살당했고, 그 직후 부레비스타 역시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왕국은 적어도 넷으로 분열되었지만, 다키아인들은 로마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특히 기원전 11년 또는 10년의 침공은 매우 파괴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장군들은 다키아인들을 점차 도나우 강 좌안에서 밀어내고, 우안의 로마 속주 모이시아에 8만 명을 정착시켰습니다.
서기 69년 가을, 다키아인들은 군단이 비텔리우스와의 내전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면서 방비가 허술해진 모이시아를 공격했습니다. 여러 요새를 점령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장군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에게 격퇴되었고, 무키아누스는 이후 이탈리아로 진군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와 데케발루스의 전쟁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벌어진 보다 본격적인 전쟁의 발단은 명확하지 않지만, 로마 측의 도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데케발루스(Decebalus) 아래 재결집한 다키아인들은 서기 85년 모이시아를 습격해 속주 총독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살해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듬해 질서를 회복했지만, 그의 지휘관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는 실패로 끝난 침공에서 군대 대부분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서기 88년 로마는 철문 협곡 근처 타파이(Tapae)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더 서쪽의 부족들과의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강화를 체결했습니다. 로마의 종주권은 인정받았지만, 다키아인들은 보조금과 기술자 파견이라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트라야누스의 정복과 로마 속주 시대
101년 트라야누스는 전쟁을 재개했고, 102년에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체게투사(Sarmizegethusa, 오늘날 루마니아 사르미체게투사 인근으로 추정)에 로마 수비대를 두는 내용의 강화 조약을 강요했습니다. 105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106년에는 나라 전체가 정복당해 주민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북쪽으로 쫓겨났습니다. 트라야누스는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그의 원정은 로마에 세워진 거대한 개선 기념물인 트라야누스 원주로 기념되었습니다. 정복의 동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키아의 광산은 즉각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도로가 건설되었고, 사르미체게투사와 체르나(오늘날 오르쇼바)는 식민 도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새로운 로마 속주는 처음에 최소 두 개 군단을 거느린 집정관급 대리관(legate)의 관할 아래 놓였으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분할되었습니다. 트란실바니아를 아우르는 상(上)다키아(Dacia Superior)는 프라이토리아니 대리관의 통치를 받았고 아풀룸(오늘날 알바율리아)에 주둔한 한 개 군단의 지원을 받았으며, 훗날 왈라키아가 된 지역의 하(下)다키아(Dacia Inferior)는 재무관(procurator)이 다스렸습니다. 159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 지역을 세 개 속주, 즉 트레스 다키아에(다키아 포롤리센시스, 다키아 아풀렌시스, 다키아 말벤시스)로 나누었고, 각 속주에는 집정관급 총독이 임명되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68년경 이들을 하나의 군사 구역으로 통합했습니다.
로마의 철수
로마 영토의 경계는 아마도 명확하게 정해진 적이 없었지만, 로마는 점령을 통해 군사적·물질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도나우 강 남쪽에 병력이 필요해지면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0년경 이 속주를 포기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