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국민회의(콩그레스)의 성격
학자들 사이에서는 콩그레스(인도 국민회의)의 본질에 대해 큰 이견이 있었다. 마드라스 출신, 마라타 출신, 파르시 출신 인사들 역시 벵골인만큼이나 그 창설과 발전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이를 '벵골 콩그레스'라고 불렀다. 또 어떤 이들은 '힌두 콩그레스'라고 칭했으며, 교육받은 인도인들만의 기구라고 규정하며 그 민족적 성격을 부정하기도 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콩그레스의 조직과 목표를 살펴보면 콩그레스가 민족적 기구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첫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서로 다른 종교, 계급, 종파, 지역 출신이었다.
여러 분야에 미친 콩그레스의 영향
엘리트 지식인층에 대한 영향
콩그레스가 A.O. 흄(A. O. Hume)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이를 이끌었다. 다다바이 나오로지(Dadabhai Naoroji), 수렌드라나트 배너지(Surendranath Banerjee), 우메시찬드라 배너지(Umesh Chandra Banerjee), 페로제샤 메흐타(Ferozeshah Mehta), 마하데브 고빈드 라나데(Mahadev Govind Ranade) 판사,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Pandit Madan Mohan Malviya) 등 지식인 지도자들이 콩그레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인도 거주 영국인들에 대한 영향
1907년경까지 많은 저명한 영국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콩그레스에 합류했다. A.O. 흄, 윌리엄 웨더번(William Wedderburn), 헨리 코튼 경(Sir Henry Cotton), 안드리엘 윌(Andriel Yule), 노턴(Norton) 등 온건파 앵글로-인디언들도 콩그레스에 가담했다.
일반 대중에 대한 영향
영령 인도에 거주하는 다양한 종교 공동체와 카스트 출신의 교육받은 대표들이 콩그레스 연례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상호 애정과 신뢰의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콩그레스 창설 이후 민족의식, 민족 통합, 공공 봉사라는 숭고한 이상이 인도 전역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당시 콩그레스가 추구한 숭고한 이상은 곧 그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초기에는 콩그레스의 인기가 교육받은 계층에 국한되었지만, 이후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면서 일반 대중의 관심도 점차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다양한 종교에 대한 영향
콩그레스 첫 회의는 힌두교도였던 우메시찬드라 배너지가 주재했다. 두 번째 회의는 파르시였던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세 번째 회의는 무슬림인 바드루딘 타이압지(Badruddin Tyabji)가 주재했다. 네 번째 회의는 유명한 영국 상인이자 기독교도인 조지 윌(George Yule)이 주재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처럼 콩그레스는 다양한 종교의 지도자들을 회장으로 선임함으로써 특정 종교의 영향력 아래 놓인 기구가 아니라 폭넓은 민족적 포용성을 지닌 기구로 발전했다.
무슬림에 대한 영향
초기에는 콩그레스 내 무슬림 대표의 수가 적었지만, 점차 그 수가 늘어났다. 시르 사이드 아흐메드(Sir Syed Ahmed)는 무슬림들을 콩그레스로부터 멀리하려고 애썼다. 그는 영국 왕실 충성파들의 단체인 '연합 애국 협회(United Patriotic Association)'와 무슬림을 위한 '모하메드 교육 콩그레스(Mohammedan Education Congress)'를 결성했다. 이런 소수의 인물들을 제외하면, 콩그레스는 순수하게 대표성을 지닌 기구였으며 그 대표들은 민족적 이념을 대변했다. 네 번째 콩그레스 대회에는 1,248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그중 221명이 무슬림이었고 220명이 기독교도였다.
번왕국(토후국) 주민들에 대한 영향
콩그레스는 영령 인도에서 민족적 형태를 갖추었지만, 1938년 하리푸라 회의까지는 번왕국을 자신의 관할권에서 완전히 분리해 두었다. 이로 인해 1885년부터 1938년까지의 기간 동안 번왕국 인도 주민들에게는 콩그레스의 특별한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영향
콩그레스는 제국주의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제국주의 성향의 영국인들은 처음부터 콩그레스를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1886년 5월, 헨리 메인 경(Sir Henry Maine)은 더퍼린 경(Lord Dufferin)에게 편지를 보내 흄에 대해 심각한 비난을 퍼부었다. "리폰 경에게 물러난 흄이라는 사악한 자가 있다. 그는 인도 자치 운동(Home Rule Movement)의 주요 선동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매우 영리하지만 다소 고집세고 오만하며 도덕에 집착하는 인물로… 진실 따위는 개의치 않는 자다."
1886년 12월, 더퍼린 경은 콩그레스 대표들을 위해 캘커타에서 환영회를 열었지만, 콩그레스의 요구가 구체화되자 콩그레스 서기 A.O. 흄에게 깊이 짜증을 냈고, 흄에 대한 불만을 매우 격한 언어로 표출했다.
잉글랜드 국민들에 대한 영향
1890년 콩그레스는 잉글랜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선전 활동을 벌였다. 이 대표단의 방문 이후, 인도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영국 여론을 끌어모으기 위해 런던에서 '인디아(India)'라는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러한 선전 활동 덕분에 잉글랜드 사람들도 콩그레스의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0년 랜즈다운 경(Lord Lansdowne)은 콩그레스가 인도의 강력하고 책임감 있는 정치 조직임을 직접 인정했다.
결론: 민족 기구로서의 콩그레스
따라서 콩그레스는 탄생 초기부터 확실히 민족적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계급, 종교, 카스트의 사람이 회원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영향력은 인도의 어느 한 구석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이었다. 처음에는 일반 대중의 지지가 적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콩그레스의 민족적 형태가 확대되고 인기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콩그레스는 헌법적 수단을 통해 인도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콩그레스 두 번째 회의에서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는 이렇게 말했다. "인도 국민은 이 위대한 기구를 통해 발언권을 얻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영국에 우리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콩그레스의 초기 활동 결과로 인도 내에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헨리 코튼 경은 이렇게 평했다. "콩그레스 의원들은 어떤 경우에도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국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국민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는 분명히 성공했다."
콩그레스의 탄생이 인도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콩그레스는 대영제국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탄생했다. 그 강대한 권력에 맞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콩그레스는 불과 몇 년 만에 폭넓은 민족적 성격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