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다
피피누 3세(소 피피누)가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두 아들인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사이에 분할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를로만이 요절하면서 샤를마뉴는 프랑크의 유일한 왕이 되어 왕국을 재통일했고, 조카들, 즉 카를로만의 후계자들의 상속권을 빼앗았습니다.
문제는 이 조카들이 롬바르디아(이탈리아 북부) 국왕 데시데리우스의 외손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롬바르디아 왕에게 피신했고, 데시데리우스는 772년 교황령(로마와 바티칸 지역) 영토를 병합하는 등 패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에 샤를마뉴는 롬바르디아 침공을 결심합니다. 774년 파비아(롬바르디아)에 대한 긴 포위전 끝에 데시데리우스는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으며, 샤를마뉴는 억류되어 있던 교황 하드리아노 1세를 석방했습니다. 이후 샤를마뉴는 프랑크와 롬바르디아의 왕, 그리고 교회의 위대한 수호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800년 12월 25일
등장 인물:
- 샤를마뉴 (Charlemagne)
- 교황 레오 3세 (Leo III)
대관식의 진행 과정
그 이후로도 샤를마뉴는 멈추지 않고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롬바르디아를 정복한 뒤에는 작센족을 복속시키고 서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며 당대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황제 대관식은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바실리카(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의 주재 아래 거행되었습니다. 프랑크족의 보호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로마인의 황제'라는 특별한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카룰루스 마그누스(Charles the Great, 샤를 대제)라는 이름이 이토록 잘 어울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원래 대관 의전에 따르면, 샤를마뉴는 군중들이 자신의 즉위를 환호하는 소리를 기다린 뒤 스스로 관을 취해 직접 머리에 씌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에 잠든 사이, 교황 레오 3세가 슬쩍 먼저 관을 씌워 버렸고, 이는 '권력이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스스로의 힘으로 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샤를마뉴는 분노한 채 자리를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아헨 궁전 — 로마를 재현하다
성(城)에서 성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하던 샤를마뉴는 결국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아헨(Aix)에 정착했습니다. 궁전 공사는 795년경 시작되어 약 10년간 계속되었지만, 그는 이미 800년에 그곳에 입주했습니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훌륭한 돔을 갖춘 궁정 예배당을 세웠고, 이 덕분에 도시 이름도 '아헨(온천의 예배당)'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궁전은 열주(列柱), 아치, 볼트 등 고대 로마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습니다. 대리석과 같은 최상급 재료가 사용되었고, 모든 것이 '영원한 도시 로마'를 연상시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궁전의 웅장한 알현실은 무려 46 × 20미터 규모로, 궁정의 화려함을 짐작케 합니다. 샤를마뉴는 훗날 르네상스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문화 발전을 추진했습니다. 도서관은 매우 방대했고, 필사가들이 작업장에서 끊임없이 필사 작업을 수행했으며, 교육이 핵심 역할을 담당했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까지 운영되었습니다.
대관식의 결과와 영향
샤를마뉴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권력을 관료들에게 위임했습니다. 또한 미시 도미니키(missi dominici)라 불리는 감찰관들이 방대한 영토 곳곳의 상황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체계를 운영했습니다. 나아가 여러 장(章)으로 나뉘어진 왕령, 즉 '카피툴라리아(capitularia, 라틴어 capitula에서 유래)'라 불리는 정치·법률·경제·행정 관련 법령을 대거 반포함으로써 법체계를 발전시키고, 제국을 개혁하고 안정시키는 데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