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작은 마을로 시작해 고대 세계 최강의 제국 중 하나로 성장한 도시입니다. 이탈리아 반도, 곧 유럽 지중해의 중심부에 위치한 로마는 이 지역 정치와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건국 신화
로마의 건국은 전설에 싸여 있습니다.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기원전 1400년경 그리스인들에게 트로이가 멸망한 뒤 이탈리아로 피신한 트로이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이라고 전해집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왕위를 찬탈한 아물리우스의 명령으로 티베르 강에 버려졌습니다.

루벤스의 그림 일부로, 암늑대의 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뒤 한 농부에게 길러진 형제는 성장하여 아물리우스를 폐위시킵니다. 이후 형제는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다툼 끝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의 초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로마는 티베르 강변에 있던 라틴족과 사비니족 목축민들의 일곱 작은 마을이 통합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도시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로마 왕정기 (기원전 753년 ~ 509년)
왕정 시대 로마 사회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 파트리키(귀족): 귀족과 대지주로 구성된 지배 계급
- 플레브스(평민): 상인, 장인, 농민, 소지주로 구성된 계급
- 클리엔테스(문객):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에 의존하며 살아가던 서비스 제공자들
로마 왕정에서 국왕은 행정, 사법, 종교 기능을 모두 행사했습니다.
국왕은 30명의 가부장으로 구성된 쿠리아 회의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쿠리아 회의는 시대에 따라 역할이 변했지만, 법률 제정, 법적 구제, 국왕 선출의 비준을 담당했으며, 특정 시기에는 원로원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파트리키로 구성된 원로원은 국왕을 보좌하고 국왕이 제출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는 당시 일곱 왕의 통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마지막 세 왕이 에트루리아인이던 시기에 파트리키의 정치적 권력은 약화되었습니다. 국왕들이 평민과 가까워지는 모습은 파트리키의 반발을 샀고, 기원전 509년 마지막 에트루리아 왕이 폐위되는 정변이 일어나면서 왕정은 막을 내렸습니다.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9년 ~ 27년)
공화정의 수립은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기구였던 원로원의 지배력 확립을 의미했습니다. 행정권은 파트리키가 독점한 관직에 속했습니다.
로마 공화정은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간의 계급 투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파트리키는 특권을 유지하고 정치·경제적 이익을 지키며 평민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기원전 449년부터 287년 사이에 평민들은 다섯 차례의 반란을 조직했고, 그 결과 호민관(트리부누스 플레비스) 제도, 십이표법, 리키니우스법, 카눌레이우스법 등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두 계급은 실질적으로 평등해졌습니다.
로마의 팽창

포에니 전쟁 당시 코끼리가 전투 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정복의 첫 번째 단계는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장악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 즉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146년)이었습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불과 백여 년 만에 지중해 전역이 로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공화정의 위기
로마 공화정에서 노예제는 모든 생산의 기반이었으며, 노예의 수는 자유민을 초과했습니다. 노예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수십 차례의 반란을 초래했습니다.
가장 큰 노예 반란 중 하나는 기원전 73년부터 71년까지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반란이었습니다. 반군을 이끈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권력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정치 세력의 균형을 위해 기원전 60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세 정치 지도자를 집정관으로 임명했고, 이들이 제1차 삼두정을 결성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로 구성된 제2차 삼두정이 성립되었습니다.
권력 다툼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프린켑스'(제1시민)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공화정의 형식을 유지한 채 시작된 제정의 첫 단계였습니다.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 서기 476년)

서기 70년경 로마 제국이 지배한 영토 지도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서기 14년)는 로마 사회를 재편했습니다. 빵과 밀 배급을 확대하고 공공 오락을 제공하는 소위 '빵과 서커스' 정책을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여러 왕조가 이어졌습니다. 주요 황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티베리우스 (14~37)
- 칼리굴라 (37~41)
- 네로 (54~68)
- 티투스 (79~81)
- 트라야누스 (98~117)
- 하드리아누스 (117~13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
로마 제국의 쇠퇴
235년부터 제국은 군인 출신 황제들이 다스렸으며,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외족의 침입에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3세기는 군인 황제 시대의 무정부 상태가 되돌아온 시기로 특징지어집니다. 불과 반세기(235~284년) 동안 로마에는 26명의 황제가 등장했는데, 이 중 24명이 암살당했습니다.
395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분할되었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수도 로마의 서로마 제국을, 아르카디우스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을 물려받았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은 해체되었고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476년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점으로 간주합니다.
강대했던 로마의 명맥은 동로마 제국만이 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
- 광대한 영토 확장 덕분에 제정 시대 로마인들은 세계 인구의 25%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 왼손잡이는 불운하고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근대까지 이어져 아이들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도록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 로마인들은 매우 위생적인 민족이었습니다. 부유층은 집에 상수도를 갖추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 근처의 샘물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공중목욕탕을 찾았습니다.
- 소변은 함유된 산성 성분 덕분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치아를 하얗게 만들거나, 빨래를 세탁하거나, 화폐를 제작하는 데 쓰였습니다.
확인 문제
1. (Mackenzie) 기원전 2세기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인 포에니 전쟁은 무엇 때문에 촉발되었습니까?
a) 흑해 무역 지배권과 그리스 식민지 소유권 분쟁
b)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역 장악 및 지중해 무역 독점
c) 시칠리아 섬 장악과 지중해 무역 지배권 분쟁
d) 로마 장군들 간의 제국 분할과 시라쿠사의 카르타고 복속
e) 팽창하는 로마 세계와 페르시아 야만 세계 간의 충돌
정답: c) 시칠리아 섬 장악과 지중해 무역 지배권 분쟁
2. (Mackenzie) 로마 공화정 시기에 시민적·정치적 평등의 실현, 호민관 제도, 십이표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a) 로마 평민(플레브스)이 겪은 정치적 소외,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불평등
b) 노예 생산 체계의 위기와 노예의 콜로누스화, 그에 따른 농업 쇠퇴
c) 군대 권력의 강화와 외족 침입 압력에 대응한 정치·행정 개혁
d) 정복으로 인한 로마의 부 유입과 기사(에퀴테스) 계급의 약화
e) 모든 인간의 평등을 설교하는 기독교의 부상
정답: a) 로마 평민(플레브스)이 겪은 정치적 소외,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불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