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종교개혁가 존 칼빈, 박해 속에서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 박해 속에서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 로 만들다

존 칼빈(1509~1564)은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입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외쳤고, 그 대가로 평생을 추방과 박해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련 속에서 칼빈은 유럽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박해받던 개신교도들

16세기 프랑스에서 최초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잔혹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단지 예배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찔리고, 목이 잘리고, 교수형에 처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 칼빈은 프랑스를 떠나 이미 개신교 도시가 된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1536년, 칼빈은 『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특별히 프랑스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와 중세의 사상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더 공정한 방식으로 개혁하고자 할 뿐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박해를 멈춰 달라는 호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갓 등장한 인쇄술 덕분에 이 책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판본으로 출간될 수 있었고, 칼빈은 이 한 권의 책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칼빈은 평생 이 책을 다듬고 보완하며 자신의 개신교 신념을 설명했습니다. 그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 안에 계시며, 인간이 정의롭게 행동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네바, 개신교의 로마가 되다

칼빈은 원래 스트라스부르(당시 아직 프랑스 영토가 아니었던 개신교 도시)로 가고자 했지만, 종교 전쟁 때문에 프랑스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잠시 머물 생각으로 제네바에 들렀는데, 사실 단 하룻밤만 묵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에 살던 또 다른 프랑스 출신 개혁자 기욤 파렐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파렐은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제네바를 완전한 개신교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고, 학자로서 존경받던 칼빈이 제네바 시민들을 설득해 모두 개신교로 개종하게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1536년 5월 21일 종교개혁을 수용했지만, 정작 영적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칼빈은 처음에 그 역할을 원하지 않았지만, 파렐의 강한 압박 끝에 결국 받아들이고 제네바에 남게 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자선과 검소함을 실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칼빈은 곧 반대파와 마주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칼빀과 파렐이 너무 엄격하다고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주민들이 성경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했고 그들을 일일이 감시했는데, 이는 금세 제네바 시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칼빈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찬을 주는 것조차 거부했고, 이제 그는 이방인인 데다 적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제네바에 온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칼빈은 친구 기욤 파렐과 함께 부유한 시민들과 유력자들의 압박에 못 이겨 제네바를 떠나야 했습니다. 칼빈은 1538년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난민 공동체의 목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도시의 개혁자 마르틴 부처를 만났습니다. 또한 두 아이를 둔 젊은 과부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하여 그녀의 아이들을 거두어 키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자크가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3년 후, 칼빈은 첫 번째 방문 때와 같은 이유로 다시 제네바에서 청원을 받게 됩니다. 의무감에 그는 돌아오기로 합니다. 자신을 추방했던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시민들과 개신교 사상을 나누는 데 성공했고, 결국 평생을 제네바에서 보냅니다.

1549년 3월 29일, 이미 병약하던 아내 이들레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빈은 크게 슬퍼했고 다시는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글을 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위안을 찾았습니다. 칼빈은 형제 앙투안과 자매 마리와 함께 살았는데, 이들이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그는 모든 개신교도를 형제로 여겼습니다.

칼빈은 늘 분주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아를 거두고 친구들을 맞이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고,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주 병을 앓았습니다. 1564년 5월 27일, 수많은 친구와 저술로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제네바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