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의 넷째 날 아침, 우리는 콜로세움 방문을 위해 서둘렀다. 전날 메룰라나 플라조에서 콜로세움, 로마 포럼, 팔라티노 언덕 통합 입장권을 구해두었는데, 콜로세움 입장 시간이 정오 12시로 지정되어 있었다. 오전 9시 30분에 아파트를 나서 포럼과 팔라티노를 먼저 둘러보려 했으나, 출발이 늦어져 오전 10시 15분에야 숙소를 떠날 수 있었다.
버스 환승과 콜로세움 도착
오전 10시 30분, 버스에 올랐다. 이제 로마 남부에서 중심부 또는 북부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첫 버스는 '비아 아르헨티나(Via Argentina)'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주었고, 그곳에서 갈아탄 버스로 오전 11시 15분경 콜로세움 앞에 도착했다.
콜로세움 앞에서 느끼는 역사의 무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역사적 건축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고 폭압적이며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 증언하는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서기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해 지어진 이 원형극장에서 수천 명의 검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왕과 귀족들은 검투사들을 서로 죽이게 하며 부를 축적했고, 굶주린 사자가 기독교 성인 안드로클로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는 전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으로 귀족들이 로마 거리에서 살해당했던 곳이자, 6,000명의 검투사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역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였다. 그 문이 우리를 위해 한 시간 뒤 열릴 예정이었다.
로마 포럼과 팔라티노 언덕, 긴 줄에 발길 돌리다
이미 11시가 넘은 시각, 콜로세움 입장(12:00~12:25) 전에 포럼과 팔라티노를 먼저 보려 했으나, 이미 관광객들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버지는 줄을 서는 것을 포기하고 콜로세움 밖 빈 받침대에 앉으셨다.
비닐 우의 200루피, 바가지 상술
줄을 서며 시간 계산을 해보니 12시 25분 전까지 나와 콜로세움에 들어가기엔 촉박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비자이가 로마 기상청 예보에서 오늘 11시부터 우기가 시작된다고 본 기억이 났다. 어제 길에서 산 우산을 숙소에 두고 온 데다, 쏟아지는 폭우엔 소용없었다. 방글라데시 상인들이 우비와 비닐 우의를 팔고 있었는데, 장당 5달러를 불렀다. 인도라면 30~40루피면 살 얇은 비닐이 손톱에 찔리면 터질 정도였다. 실랑이 끝에 장당 2.5유로, 약 200루피에 네 장을 샀다. 비자이와 디파는 집에서 가져온 방수 윈드치터가 있어 필요 없었다.
관광객을 위한 배려는 없고, 상술만 난무하다
수천 명의 관광객이 비에 젖어 줄 서 있는 동안, 그들을 위한 지붕 하나, 의자 하나, 화장실 하나 없었다. 마치 일부러 시설을 외면해 상인들의 장사를 돕는 듯 보였다. 몇 년 전 인도 기차역에서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 수도꼭지 물을 끊어 생수병을 비싸게 팔던 행태와 닮았다. 다만 나렌드라 모디 총리 취임 후 인도에선 이런 시스템이 많이 개선되었다.
화장실 한 번에 80루피
급한 대로 콜로세움 뒤편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 약 5.5km를 걸었다. 나이지리아계로 보이는 직원이 1유로, 약 80루피를 요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낼 수밖에 없었다.
사전 예약 티켓의 위력, 콜로세움 입장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정오였다. 여전히 폭우 속에 두 줄로 줄이 서 있었다. 한쪽은 현장 구매자들로 소그룹씩 들여보내고, 다른 한쪽은 사전 예약자들을 바로 입장시켰다. 우리는 후자 덕분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티켓 여섯 장 중 두 장이 비에 젖어 스캔이 안 됐지만, 직원이 상급자와 상의 후 모두 입장시켰다.
콜로세움 내부, 2천 년 전의 공학과 잔혹함
약 2,000년 전 지어진 건물이 아직도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일부는 정부가 보수했지만, 원형 설계는 그대로다. 중앙의 원형 경기장 주위로 검투사들이 갇혔던 작은 방들이 있고, 위층엔 황제와 왕족, 귀족, 평민이 앉았던 발코니가 있다.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육을 오락으로 즐겼다. 싸움을 거부한 검투사는 굶주린 사자에게 던져졌고, 관중은 환호했다. 이 모든 건 오락과 부의 축적,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했다.
약 1시간 30분 머문 뒤 비가 그쳤지만 아버지는 완전히 지치셨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휴식한 뒤 오후 4시경, 아버지는 열이 나고 피곤하다며 남아계셨고 우리만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으로 향했다.
판테온, '천사와 악마'의 무대가 된 고대의 신전
몇 년 전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를 읽었다. 로마의 고대 건축물, 광장, 분수, 교회를 배경으로 종교와 과학의 대립, 추기경의 음모를 그린 소설이다. 반물질 탈취와 파괴를 둘러싼 연쇄 살인이 끝나갈 무렵, 로마의 옛 교회, 묘지, 바실리카, 탑, 분수, 광장이 독자의 눈앞에 살아난다. 판테온도 그중 하나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바로 그 판테온이 내 앞에 있었다.
판테온의 기원과 변천
기원전 31년, 마르쿠스 아그리파(루키우스의 아들)가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해 세 건물(마르스 신전, 아그리파 공중목욕탕, 넵투누스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때 완성되어 '아우구스투스 양식'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세 건물은 지금도 로마 중심부에서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남아 있다. 마르스와 넵투누스 신전은 황제 일가만 쓰였고, 아그리파 목욕탕만 대중에게 개방됐다. 판테온 앞에는 '판테온 돔(Pantheon Dome)'이라 적힌 라틴어 비문이 남아 있다.
네로 황제(서기 54~68년) 때 대화재로 세 건물이 크게 손상되었고,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 때 재건됐다. 서기 80년 티투스 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또 대화재가 났고, 도미티아누스가 판테온을 다시 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97~117년) 때인 110년 적의 공격으로 또 불탔고, 트라야누스가 재건을 시작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성했다. 이 시기 벽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세베루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가 202년 보수했고, 그 비문도 벽에 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판테온은 로마 황제들의 주신전이었으나, 이후 폐허가 되기 시작했다. 609년 비잔티움의 포카스 황제가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넘겼고, 그는 이를 '산타 마리아 에 마르티레스 로툰다(Sancta Maria et Martyres Rotunda)'라는 교회로 봉헌했다. 이때 교황이 '천사(신)들, 실은 악마(다이몬)들'이라 선포했는데, 여기서 댄 브라운이 소설 제목 '천사와 악마'의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포카스 황제 순교 성인들의 유해를 28대 수레에 실어 판테온 주변에 안치했고, 로마의 금속 장식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뜯어갔다. 정치적 혼란기엔 대리석, 조각들도 약탈당해 일부는 대영박물관에 있다. 15세기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자 멜로초 다 포를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수태고지' 등 명화로 내부가 장식됐고, 라파엘, 안니발레 카라치, 아르칸젤로, 발다사레 페루치 등 거장들이 이곳에 묻혔다.
베르니니와 바르베리니 가문의 수탈
17세기 우르바노 8세 바르베리니(1623~44) 때 판테온 포르티코의 거대한 청동 기와를 뜯어냈다. 90%는 산탄젤로 성의 대포와 포탄으로, 나머지 10%는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드는 데 썼다. 양옆 장식 구조물을 '당나귀 귀'라 부르며 철거하고 벽돌 기둥 두 개를 세웠는데, 19세기 말까지 남았다. 당대 시인은 "야만인(바르바리안)도 못한 짓을 바르베리니가 했다"고 탄식했다.
이탈리아 왕가의 안식처, 현재의 판테온
이탈리아 통일 후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후 움베르토 1세와 마르게리타 왕비도 이곳에 안장됐다. 현재는 가톨릭 성당으로, 수천 관광객 속에서도 미사와 혼배가 수시로 열린다. 메인 돔은 지름 142피트, 높이도 142피트의 완벽한 구형이다. 앞엔 큰 현관이 있고, 이 광장은 '피아차 델라 로톤다(Piazza della Rotonda)', 즉 '로톤다의 광장'이라 불린다. 이 건물을 통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 로마의 건축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 이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됐고, 아그리파 목욕탕 유적만 남아 기독교 이전 로마를 보여준다.
나보나 광장, 베르니니의 4대 강 분수와 저녁의 열기
판테온에서 약 500m, 좁은 골목을 지나 나보나 광장에 도착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덕분에 세계적 관광지가 된 분수가 있다. 차들이 빠르게 달리지만 보행자를 보면 기계적으로 멈춘다. 긴 직사각형 광장 양끝과 중앙에 세 분수가 있다. 대리석 조각상으로 장식됐고, 인물상 다수가 실제 크기보다 크다. 고대 로마 신상들로, 대부분 나체다. 고대 로마인들은 나체 신상을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바로크 광장으로
1세기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도미티아누스 경기장(Stadium of Domitian)' 혹은 '키르쿠스 아고날리스(Circus Agonalis)'를 지었고, 황제 가족과 귀족이 경기를 관람했다. 나중에 '나보나'로 불리게 됐고, 지금도 경기장 형태 그대로 2,000년간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인노첸시오 10세(1644~55) 때 '바로크 로마 양식'의 대형 건물들이 들어섰고, 팜필리 가문의 궁전 '팔라초 팜필리'도 광장을 향하게 지어졌다.
세 개의 분수
중앙의 '포르타나 데이 콰트로 피우미(Fontana dei Quattro Fiumi, 4대 강 분수)'는 1651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작. 위에 '도미티아누스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데, 막센티우스 키르쿠스에서 조각조각 가져왔다. 남쪽 '포르타나 델 모로(Fontana del Moro)'는 1575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 작, 1673년 베르니니가 무어인과 돌고래상을 추가했다. 북쪽 '넵투누스 분수'는 1574년 델라 포르타 작, 넵투누스 상은 1878년 안토니오 델라 비타가 균형을 맞추려 추가했다.
이 광장에선 예부터 연극이 열렸고 지금도 이어진다. 1652~1866년 8월 매 주말 팜필리 가문이 축제를 열었고, 한때 시장이 섰다가 1869년 캄포 데 피오리로 옮겼다. 지금도 크리스마스엔 임시 시장이 선다.
저녁 나보나 광장, 환락과 허무 사이
도착했을 땐 저물녘이었지만, 로마는 밤 9시까지 해가 길어 여유로웠다. 수천 인파 속에 서커스, 무용, 음악 공연이 펼쳐지고, 낯선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금세 하나가 되어 원을 그리며 춤췄다. 인도 노점상 같은 가판대에서 불꽃이 치솟고, 고급 식당 의자에 앉은 관광객들은 술을 마셨다. 담배 연기 고리, 음악, 춤, 불꽃, 분수 물줄기가 어우러져 슬픔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세상 같았다. 오직 춤, 술, 음악, 젊음, 관능, 사치, 향락만이 있었다. 부유한 관광객들이 이탈리아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 여기 있던 그들은 내일 다른 곳에 가겠고, 새 관광객이 채울 것이다. 행복을 향한 갈망은 내일도 이곳에서 춤추고, 술 따르고, 가판대 불꽃은 하늘을 핥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 순환이 시작됐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마음 한구석이 경고했다. 이 모든 몸부림은 번 돈으로 쾌락을 사려는 것뿐이라고. 대부분은 행복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나는지 모른 채, 이 순간을 행복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늘 저녁을 넘기지 못한다. 다만 이 순간만큼은, 인생을 짓누르던 수천 가지 고통을 잊고 있을 뿐이다.
교외역에서 피렌체 행 준비
나보나 광장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버스를 타고 철도역으로 왔다. 22일 아침 피렌체 행 열차를 타야 하는데, 메인역(테르미니)은 숙소에서 5km 거리다. 숙소에서 500m 떨어진 교외역(Suburban Station)에서 테르미니로 가는 열차가 있는지 물었다. 역무원은 열차보다 63번 버스가 더 편하다고 했다. 우리에겐 메룰라나 플라조에서 받은 4일 무료 버스·트램 패스가 있었지만, 짐이 너무 많았다. 짐 끌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느니 택시가 나았다. 기묘한 도시다. 오토릭샤도, 마차도, 자전거 릭샤도 없다. 버스, 트램, 택시뿐이고 셋 다 비싸다.
거대한 문과 아치의 나라, 이탈리아
로마 건물엔 거대한 문과 다양한 아치가 흔하다. 원형, 삼각형, 평아치, 한 돌이 양쪽 아치에 반씩 걸린 기묘한 돌까지. 나중에 피렌체에서도 비슷한 아치와 문을 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거지는 다르다
교외역 앞 육교 아래 한 가족이 있었다. 젊은 이탈리아 여성, 두 아이, 아버지. 인도에선 보기 힘든 준수한 외모였다. 이탈리아에도 거지가 있구나 싶었다. 부부 눈빛엔 애원보다 공격성이 더 보였다. 말을 걸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숙소까지 400m를 걸으며 로마와 베네치아 골목에서 몇 노숙자 더 봤다. 다들 몹시 마르고 노쇠해 보였다. 바지·셔츠·코트 차림에 휴대폰, 구걸 그릇, 여행용 가방까지 있었다. 인도 거지 같은 보따리는 없었다. 이탈리아 거지는 200명도 안 될 것 같다. 정부가 쉽게 재활시킬 수 있을 정도다. 관광객을 보며 기대 어린 눈빛으로 인사하지만 귀찮게 하진 않는다.
우리도 줄 게 없었다. 1유로 미만, 인도 돈 80루피 미만으론 주고 싶지 않았고, 적게 주면 인도 거지처럼 행패 부릴까 봐 겁났다.
열흘간 트랜스젠더와 마주치지 않았다
이탈리아 11일 여행 동안 단 한 번도 트랜스젠더(킨나르)를 보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