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키케로 집정관 시절과 카틸리나 음모: 로마 공화정의 위기

키케로(M. 툴리우스 키케로, 기원전 106~43년)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아르피노에서 기사 계급(에퀴테스)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저명한 법학자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동맹국 전쟁(기원전 90~88년)에는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첫 공개 변론에서 그는 술라의 총신에게 공격받던 로시우스 아메리누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그리스로 건너가 웅변술을 한층 더 연마했습니다. 또한 시칠리아에서 재무관(퀘스토르)으로 근무했는데, 기원전 75년부터 63년까지의 관력 경력(쿠르수스 호노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기원전 75년: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으로 재직하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이후 원로원 권한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활동했습니다.
  • 기원전 70년: 전(前) 시칠리아 총독 베레스의 부패를 고발하여 그를 유배로 몰아붙였습니다.
  • 기원전 69년: 조영관(에딜리스)에 당선되어 민중 지향적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기원전 66년: 법무관(프라이토르)으로 승진했습니다.
  • 기원전 63년: 집정관에 당선되었습니다.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이 아닌 '호모 노부스(homo novus)', 즉 신인(新人) 집정관이었습니다.

같은 선거에서 집정관 자리를 노리던 카틸리나가 있었지만, 크라수스의 지지를 받은 키케로가 승리했습니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의 귀환이라는 잠재적 위협에 대비해 민중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집정관 재임 중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아게르 푸블리쿠스(공유지)를 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안했지만, 재정을 담당하던 집정관 키케로는 이에 맞서 법안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반감을 사고 인기를 잃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후 그는 첩보망을 통해 카틸리나 음모—집정관들을 살해하고 로마를 장악하려는, 부채에 시달린 귀족들의 계획—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카틸리나 음모(기원전 63~62년)

음모의 계획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공화국군이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영광을 쌓고 있는 동안, 로마 본토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기원전 109~62년)의 음모로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민중을 현혹할 줄 알고 어떤 범죄도 서슴지 않았던 파트리키(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이었습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집정관에 오르는 데 실패한 그는 폭력에 의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피에솔레에 지지자들을 집결시키고 늙은 백인대장 만리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며, 기원전 63년 11월 6~7일 회합에서 집정관 선거의 경쟁자였던 키케로 암살을 결의했습니다. 계획은 키케로 살해 후 일어날 혼란을 틈타 로마로 진군하고, 도시에 불을 지른 뒤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개와 결과

음모의 내용을 파악한 키케로는 원로원을 소집하고 적대자를 통렬하게 규탄하는 제1차 카틸리나리아 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카틸리나여, 끝내 언제까지 우리의 인내를 유린할 작정인가?"(Quousque tandem, Catilina, abutere patientia nostra?) 결국 카틸리나는 회의장과 도시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다음 날(11월 8일) 키케로는 제2차 카틸리나리아 연설을 통해 사태의 전말을 민중에게 알렸습니다. 카틸리나는 에트루리아로 도주해 추종세력의 지휘를 맡았으나, 키케로의 집정관 동료 안토니우스의 부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정부군에 패해 피스토이아 전투(기원전 62년 1월 초)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한편 로마에 남은 공범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운명을 두고 벌어진 원로원 논쟁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 카토, 기원전 95~46년)가 사형을 주장해 가결시켰습니다. 키케로는 국민 상소권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절차상으로는 불법이지만 형을 즉시 집행했습니다.

키케로에 대한 평가

키케로는 평생 원로원파(보수파)와 기사 계급 간의 화해, 이른바 '계급 간 조화(concordia ordinum)'를 추구했습니다.

공화국을 구한 공로로 그는 민중들로부터 '국부(國父)'(파테르 파트리아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4년 뒤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눈부신 영광에 그의 위상은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1년 9월 29일 세 번째 개선식을 성대히 거행한 뒤 정치적 동맹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크라수스와 합의하여 권력을 분점하는 삼두정(제1차 삼두정치)을 결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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