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생 최대의 승리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병력에서 5배나 열세였던 마케도니아군은 페르시아군을 격파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전술적으로 완벽히 압도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위대한 왕 다리우스가 자신의 땅에서, 낫을 단 전차와 전투 코끼리 같은 특수 무기를 앞세우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왕국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군사 조직과 그것을 사용하려는 야망까지 함께 계승한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수년간의 전쟁 끝에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일했고, 그리스와 주변 이방 민족들에게 힘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군대야말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사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만약 필리포스가 46세에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가 아닌 필리포스 자신이 거대한 페르시아와 맞서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가우가멜라 전투 핵심 정보
- 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이끈 4만 7천 명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연합군 vs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330년)가 지휘하는 약 24만 명의 페르시아군.
- 어떻게: 알렉산드로스가 경사진(사선) 진형으로 페르시아 전선을 돌파하자 다리우스가 도주했고, 페르시아군은 와해되었습니다.
- 어디서: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텔 고멜(Tel Gomel) 인근.
- 언제: 기원전 331년 10월 1일.
- 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정면으로 격파하여 페르시아 제국 정복을 완수하려 했습니다.
- 결과: 다리우스는 자신의 장군들에게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롤모델과 영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왕자답게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담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가 속한 문화는 위대한 남자일수록 개인의 위험을 경멸하고 스스로를 던져 명성을 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철학과 과학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직접 배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으로 임명된 데에는 어린 알렉산드로스의 무모함과 공격성을 통제하거나, 적어도 철학적이고 문명적인 가치관으로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컸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에게 많은 것을 배워 매우 학식 있는 인물이 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헤라클레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소년 그대로였습니다. 헤라클레스의 업적을 담은 호메로스의 기록은 알렉산드로스의 전반적인 태도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자신을 고대 그리스 영웅들의 현대판이라 여겼을 것이고, 상당 부분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었습니다.
필리포스 2세 치세의 상황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을 계승했을 때, 필리포스 2세는 이미 이 나라를 그리스 세계의 최강국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아테네, 테바이, 심지어 스파르타조차 그 위광에 눌려 있었고, 페르시아는 트라키아에서 몰려 나갔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후기 원정 일부에 참여하며 공격적인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 사회의 성격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기존 귀족 계층에게 의무 병역을 부과했고, 군대는 출세의 확실한 길이 되었습니다. 필리포스는 뛰어난 장교와 병사들에게 후하게 보상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관대함이 사기에 미치는 효과를 빠르게 파악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권력 장악
필리포스는 자신의 호위병 한 명에게 암살당했는데, 그 음모 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그럴듯한 해석들도 존재하며,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마케도니아 국왕의 암살 배후에 페르시아가 있다는 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왕위 계승 과정은 전형적으로 격동적이었습니다. 잠재적 경쟁자와 적들은 암살되거나 처형되었고, 그 여파는 알렉산드로스 재위 내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즉각 자신만의 정복 원정을 개시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초기 원정은 북부 변경의 부족 반란과 그리스 본토의 소요를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그는 늘 바라던 페르시아 방면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미 마케도니아 분견대가 페르시아 영내에서 소규모 교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증강하고 위대한 원정에 나섰습니다.
기원전 334년의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습니다. 지중해에서 인도양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극도로 부유했습니다. 다리우스 치하의 페르시아 제국은 막대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여러 지역과 문화 출신이었습니다. 공통된 조직 구조가 없었고, 어떤 경우에는 언어 자체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국 병사 다수는 정복당한 민족 출신으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위대한 왕을 위해 싸울 열정이 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방어하고 통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운용하는 군대 일부가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다리우스 군대의 일부는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용병은 페르시아 군의 대다수를 이루던 속민 부대보다 대체로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 용병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소아시아로 진격할 때 처음 맞선 군대의 핵심 골격이 되었습니다.
그라니코스 강에서의 승리
알렉산드로스는 극도로 공격적인 지휘관이었고, 어떤 형태의 방어 준비든 약함의 징후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군이 그라니코스 강 너머에 진을 치고 강을 건너느라 그의 공세가 늦어지더라도, 그는 오히려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무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이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 가파른 강안을 이용해 공격의 강도를 늦추고, 그 틈에 페르시아 기병으로 격퇴하려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이 가장 강해 보이는 지점으로 기병을 강 건너 돌진시켰고, 격렬한 교전 끝에 페르시아 기병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제2열이었던 그리스 용병들은 진지를 사수했으나 학살당했습니다.
그라니코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적에 대해 갖는 도덕적 우위를 확립시켰고, 다리우스로 하여금 한층 더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여러 지역 민중들이 알렉산드로스에게 귀순했고, 그는 방해받지 않고 해당 지역 정복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요새화된 항구 할리카르나소스만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함락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신속히 장악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개입하지 않았고, 일부 지역 부족들이 말썽을 일으킨 정도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킬리키아로 진격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이집트로도, 페르시아의 심장부로도 진출할 수 있었기에 다리우스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해안의 저항 도시들을 정리하고 산속의 이방 민족을 진압하는 동안 약 14만 명의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그는 남쪽 시리아로 진격해 알렉산드로스 군의 배후를 노렸고, 북쪽 산길을 통해 킬리키아로 들어온 다리우스는 어느새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선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방어적 사고에 갇혀 있던 다리우스는 피나로스 강변의 유리한 진지를 선택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다음 수를 기다렸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또다시 불안의 신호로 해석하고 정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선두에서 직접 도보로 싸웠고, 그라니코스 때처럼 결정적 순간에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와해되었고, 마케도니아군은 낙오병들을 맹렬히 추격했습니다. 다리우스 본인은 탈출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짧은 숨돌림
이후 2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절반을 손에 넣은 알렉산드로스는 저항 거점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지중해의 페르시아 함대 기지들을 없애 나갔습니다. 그는 뻔뻔할 정도로 담대하게도, 서부 원정 중 배후가 공격받지 않도록 다리우스의 방어적 성향을 역이용해 이집트를 점령했습니다.
기원전 331년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 정복을 완수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고 긴 보급선의 끝자락에 있었지만, 그는 다리우스가 제안한 '정복한 땅 인정'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제국 전체를 손에 넣기 위해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태도 그 자체였습니다.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고대 문명의 요람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며 알렉산드로스는 '왕들의 왕' 다리우스에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다리우스는 더 깊은 영토로 물러나 배후의 땅을 불태우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결국 정면 대결을 택했습니다.
다리우스의 전투 준비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보급선 끝에서 작전 중이므로 되도록 빨리 결전을 벌이려 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페르시아군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이라크 모술 인근의 땅을 전장으로 선택하고 전투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다리우스는 병력에서 5배나 우세했음에도 모든 이점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는 기병과 전차가 적에게 더 원활히 접근할 수 있도록 땅을 평탄하게 만들고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리우스의 첫 공격은 최정예 페르시아 보병 부대와 기병으로 구성된 전열이 담당했습니다. 다리우스 본인은 1만 명 규모의 친위대, 즉 그리스인들이 '불사대(Immortals)'라 불렀던 부대와 함께 페르시아 전열의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그들 앞에는 낫을 장착한 전차 약 200대가 늘어섰습니다. 막대한 보병으로 이루어진 제2열은 제1열 뒤에 배치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양익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그의 군대를 으깨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기병과 전차의 맹공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열을 돌파하고, 보병이 전진해 승리를 완성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전혀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전투의 시작
익 기동으로부터 양익을 보호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71년 테바이군이 사용했던 사선진형(oblique order)의 변형을 활용했습니다. 그는 기병 부대들을 양익에 배치하되 각 부대가 하나씩 뒤로 물러난 계단식 배열을 만들어, 적이 교전하려면 더 멀리 이동해야 하는 '후퇴형' 익을 구축했습니다. 정예 마케도니아 보병으로 이루어진 팔랑크스는 그리스 전열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예비 팔랑크스가 제2열을 형성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은 좌익의 베테랑 장군 파르메니온이 저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직접 우익을 이끌고 승리를 창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페르시아 측의 실수도 한몫했습니다. 페르시아 좌익 기병이 알렉산드로스의 우익을 크게 크게 우회하면서 자기 진영에 빈틈을 만든 것입니다. 마케도니아군은 우측으로 이동했습니다. 다리우스가 늦게 움직이면 전차가 사전에 준비한 평탄 지대의 이점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차(일부 기록에는 전투 코끼리 15마리도 포함)가 정면 돌격을 개시하는 동안, 다리우스의 기병은 마케도니아군의 양익을 포위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전열은 전차를 밀어내고 초기 맹공을 버텨냈지만, 페르시아 기병 일부가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돌파한 기병은 사전에 지시받았던 대로 예비 팔랑크스와 경보병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승리
일부 페르시아 병사들이 마케도니아군의 수송 부대를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방향을 돌려 수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당한 마케도니아군의 배후를 찔렀다면 승리에 기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계획대로 알렉산드로스는 정예 기병 '헤타이로이(Companions)'와 지원 부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좌익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페르시아 좌익 기병과 중앙 사이의 빈틈을 파고든 헤타이로이는 마주한 적군에게 처참한 일격을 가했습니다. 이어 대규모 보병 종대와 경보병이 밀려들어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군을 덮쳤습니다.
고립될 것을 두려워한 페르시아 좌익 지휘관 베소스는 후퇴를 시작했고, 이는 밀려나 있던 알렉산드로스 우익의 압박을 덜어주었습니다. 한편 다리우스 본인도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기병이 베소스를 맹공하는 대신 자신을 향해 선회한다면, 다리우스 자신이 포위당해 생포될 수도 있었습니다. 과거의 패배 기억이 페르시아 황제에게 크게 작용했는지, 그 역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우스의 친위대마저 지휘관을 따라 전장을 이탈하면서, 후퇴는 완전한 궤주로 변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좌익 상황이 절박해지고 있었기에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파르메니온의 부대는 페르시아군을 묶어두는 임무는 수행했지만 좌익에서 크게 압박받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을 공격하는 페르시아군의 배후로 돌진해 후퇴를 강요했습니다. 페르시아 우익 지휘관 마제우스는 질서 있는 철수를 시도했으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그의 병사들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페르시아 저항의 종말
이로써 가우가멜라에서의 조직적인 페르시아 저항은 끝났습니다. 남은 페르시아군은 흩어졌고, 추격당하거나 검 앞에 무너졌으며 수송 부대는 나포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생존 병력을 3일간 추격했지만 적을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잔존 기병의 상당수와 수천 명의 보병을 재편성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다리우스의 도주 후, 페르시아군 4만 명이 전사하고 4천 명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 군대는 들판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전투의 여파
가우가멜라는 다리우스에게 결정적인 패배였습니다. 왕관과 군대의 일부는 유지했지만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전할 수 없었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본토로 계속 진격했습니다. 수사를 점령한 뒤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향했고, 명목상의 칭호를 제외한 페르시아 제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가 살아 있는 한 그 칭호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다리우스는 포위망을 피해 우호적인 박트리아 왕국까지 도달했지만, 그곳에서 암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제야 페르시아인들은 항복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위대한 왕'으로 추대되었고, 페르시아를 자신의 팽창하는 제국에 더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왕국은 훗날 인도까지 뻗어나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