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메릴랜드 대학교의 티모시 코스( Timothy Koeth) 교수는 생일 선물로 기묘한 소포 하나를 받았다. 가로·세로 약 5cm, 무게 약 2.3kg의 작은 검은색 정육면체였다. 동봉된 메모에는 짤막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히틀러가 만들려던 원자로에서 가져옴. 니닝거의 선물"
이 정육면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우라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추진했던 '우란프로예트(Uranprojekt, 우라늄 계획)'의 일부로 제작된 664개의 우라늄 큐브 중 하나였다.
나치 핵개발의 시작과 좌절
1938년 말, 독일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바륨을 얻는 데 성공하면서 인류 최초의 핵분열 실험이 입증됐다. 이 발견은 물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곧 아르바이츠게마인샤프트 퓌어 케른피직(Arbeitsgemeinschaft für Kernphysik)이라는 공식 명칭의 연구팀이 꾸려졌다. 이들은 통칭 '우란프로예트'로 불렸다.
이후 군수 목적으로 전환되면서 원자로 건설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하지만 히틀러는 원자 물리학의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했고, 원자폭탄 개발에는 5년 이상이 걸린다는 판단에 흥미를 잃었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과학자들은 단기 성과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우라늄 확보, 중수 생산(노르웨이에서 연간 5톤), 동위원소 분리, 원자로 제작 등 9개 연구소에 업무를 분담했다. 총 70여 명의 전문가가 헤르만 괴링의 지휘 아래 투입됐다.
분열된 연구진, 맨해튼 계획에 밀리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자원이 전선으로 쏠리자 1942년 가을 연구는 중단됐다. 원자폭탄 완성은 1947년 이후나 가능할 것으로 보였고, 대신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용 우라늄 엔진 개발 같은 대안이 거론됐다. 이듬해 여름 알베르트 슈페어 장관이 연구 재개를 명령하며 가용 우라늄 1,200톤 전량을 투입했지만, 이미 미국은 2년 늦게 시작한 맨해튼 계획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연구의 통합성'을 꼽는다. 미국은 로스앨러모스에서 모든 인력이 한 방향으로 협력한 반면, 독일은 베를린, 라이프치히, 고토 3개 도시에서 3개 그룹이 별도로 움직이며 자원을 두고 경쟁했다. 이 분산된 구조가 결정적인 패인이 됐다.
하이거로흐의 미완성 원자로, B-VIII 실험
연합군이 독일 국경을 넘자 1944년 겨울, 베를린의 연구시설은 남서부 소도시 하이거로흐의 고성(古城)으로 이전했다. 현재 '아톰켈러 박물관'이 자리한 곳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이끈 팀은 이곳에서 'B-VIII 실험'을 진행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3년 저서 <핵물리학(Nuclear Physics)>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들이 보유한 것은 664개의 우라늄 큐브. 각각 약 2.3kg으로, 중수로 채운 탱크 속에 케이블로 매달아 수직 배열하고 주변을 흑연으로 감싼 구조였다. 하지만 우라늄이 임계질량에 비해 50% 부족했고, 그만큼 중수도 더 필요했다. 결국 원자로는 가동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
메릴랜드로 온 큐브, 그 진위를 밝히다
코스 교수는 큐브의 치수, 무게, 표면의 기공 자국(당시 조주 공정에서 생긴 기포 흔적), 케이블 통과용 홈 등을 분석해 진품임을 확인했다. 고해상도 감마선 분광 분석 결과 천연 우라늄(비농축·비고갈)이었으며, 세슘-137 같은 핵분열 생성물이 검출되지 않아 원자로가 실제로 가동되지 않았음을 뒷받침했다.
알소스 작전과 사라진 우라늄들
큐브가 미국으로 건너온 경위는 알소스 작전(Operation ALSOS)과 직결된다. 맨해튼 계획 총책 레슬리 그로브스 장관의 지휘 아래 과학자·군인 합동 부대가 독일 핵프로그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선으로 투입됐다. 1945년 4월 말 연합군이 하이거로흐에 진입하자 독일 측은 문서를 변소에 숨기고, 중수는 통에 담아, 우라늄 큐브는 인근 밭에 묻었다.
알소스 팀은 문서와 중수, 묻힌 큐브들을 확보해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송했다. 관리는 영미 합동 기구인 공동개발신탁(CDT)이 맡아 소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했다. 공식적으로는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로 보내졌으나, 모든 큐브가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400개, 고토의 숨겨진 비축분
코스 교수는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독일 우라늄(German Uranium)' 라벨이 붙은 상자를 발견했다. 최근 기밀 해제된 문서들에 따르면 하이거로흐의 664개 외에 고토에서 쿠르트 디브너 박사 팀이 별도로 추진하던 원자로용으로 400여 개가 더 있었다. 베를린 팀과 고토 팀이 협력했더라면 임계질량을 충족해 전쟁 종전 전 원자로 가동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잊힌 400개'는 전후 혼란기 동유럽 밀수 조직에 의해 암시장에 유출됐다. 서방에도 개당 수십만 달러를 부르며 팔려 했으나, 미국은 시장 가격(kg당 약 12달러)만 지불하겠다고 거절했다. 1952년 독일인 2명이 큐브 소지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으며 밀거래 실체가 드러났지만, 대부분은 소련으로 넘어갔고 행방은 묘연하다. 최근 소련 문서고에서 독일 원자폭탄 설계 스케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니닝거, 그리고 큐브의 마지막 퍼즐
그렇다면 코스 교수의 큐브는 어떻게 미국에 남게 됐을까? 그는 서점에서 1954년 발간된 <원자력용 광물(Minerals for Atomic Energy)>이란 책을 발견했다. 저자 '로버트 D. 니닝거(Robert D. Nininger)'. 메모의 '니닝거(Ninninger)'와 철자가 한 글자 차이였다. 추적 끝에 니닝거가 2004년 메릴랜드 록빌에서 별세했음을 확인했다.
그는 맨해튼 계획의 우라늄 조달 담당관으로, 유럽에서 송부된 큐브들을 인수·관리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미망인은 큐브를 오랫동안 보관하다가 여러 손을 거쳐 코스 교수에게 전해졌다고 증언했다.
여전히 흩어져 있는 역사의 파편들
이 이야기는 단일 사례가 아니다. 현재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하버드 대학교 등 미국 내 공·사립 컬렉션에 최소 10개 이상의 동일 큐브가 소장돼 있으며, 각각 나름의 사연을 품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후 영국 수용소에 억류됐다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그는 이틀 밤을 새워 임계질량과 필요 우라늄량을 계산했는데, 그 수치가 실제 맨해튼 계획의 데이터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상황과 의지만 조금 달랐더라면, 독일이 핵무기를 먼저 완성할 수도 있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