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대륙부의 개관
동남아시아 대륙부는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다양성이 특징이지만, 여러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는 놀랄 만큼 많은 공통점이 담겨 있다.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차오프라야강, 메콩강, 홍강이라는 세 개의 주요 강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각 강은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하고 매년 범람하여, 고대 동남아시아인들의 주식이었던 벼농사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농경 사회의 시작과 금속기의 도래
동남아시아 최초의 주민들은 수렵채집인이었으나, 기원전 5000년경 일부 집단은 이미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벼농사가 이 지역에 언제 전해졌는지는 역사학자들도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남부 양쯔강 유역 사람들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에 관계없이 벼농사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다음으로 큰 돌파구는 금속 가공 기술의 발견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청동기 제작은 기원전 2000년경 시작되었고, 철기 제작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역사학자들은 금속 공법이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현지인들이 자신들만의 방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더욱 복잡한 사회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동선(Dong Son) 문화
홍강 유역의 동선 문화는 무덤에서 출토된 정교한 청동 유물 덕분에 초기 문명 중 가장 잘 알려진 문화 중 하나다. 특히 기원전 500년경 동선인들은 이미 기하학적 무늬와 일상 생활 장면을 새기거나 부조로 장식한 거대한 청동 북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북 중 하나는 무게가 70kg에 달하며, 제작하는 데 1톤이 넘는 구리 광석을 녹여야 했다. 청동북이 동남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 점은 동선 문화가 다른 문화권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시사한다. 동선 문화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지만, 추장의 통치를 받았으며 신분이 계층화된 사회였다는 사실은 확인되어 있다. 서기 43년, 동선 전사들이 통치하던 지역은 중국에 편입되었다.
만달라(Mandala): 국가의 또 다른 형태
기원전 1천년기 말,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국은 세습적 권력에 기반한 추장과 귀족 계급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 왕국은 고정된 국경이 없었고, 정치력은 지배자가 적에 맞서고 동맹을 형성하는 능력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왕국'이라 할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때때로 산스크리트어 단어 만달라(mandala)를 사용해 이런 형태의 '국가'를 설명한다. 각 사회는 자기 자신과 지배자를 중심으로 했으며, 지배자들이 동맹을 맺고 깨는 과정에 따라 세력권이 넓혀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만달라는 강 유역과 교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타났다. 일부 사회는 성벽과 해자를 갖춘 정착지를 건설했고, 다른 사회들은 운하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교역 중심지를 만들었다.
중국과 인도, 두 강대국의 영향
기원전 1천년기 동안 동남아시아 문화는 중국과 인도라는 두 강대국과의 접촉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중국과의 접촉은 주로 정치·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오늘날의 북부 베트남 같은 일부 지역은 병합되어 속주로 통치되었고, 다른 만달라들은 중국 조정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반면 인도는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거나 식민지화하려 하지 않았다. 초기 접촉은 아마 인도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금, 향신료, 비단 같은 동방 산품에 대한 로마의 수요와 인도의 조선 기술 발전은 인도 상인들에게 몬순 계절풍을 따라 동남아시아 연안으로 항해해 무역할 동기를 부여했다. 점차 항구 주변에 정착촌이 생겨났다. 일부 상인이 현지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인도의 사상과 신앙은 이러한 항구들을 힌두-불교 왕국으로 천천히 변모시켰다.
옥에오(Oc Eo)와 푸난(Funan)
오늘날 베트남에 있는 옥에오 유적 발굴에서는 서기 1세기부터 6세기까지 번영했던 거대 항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 항구는 운하를 통해 다른 정착지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옥에오는 메콩 삼각주의 벼농사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았다. 시민들은 유리 장신구, 주석 장식품, 도기를 만들었고, 로마처럼 멀리서 들어온 물품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옥에오 일대 지역을 '푸난' 즉 '천 강의 항구'라 불렀으며, 기록에 따르면 삼각주의 항구들은 청동, 은, 금, 향신료를 취급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자기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인도 및 중국 문화의 요소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듯하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으며, 산스크리트는 많은 현지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힌두교와 불교는 물론, 이에 딸린 예술·건축 양식 역시 동남아시아 대다수 사람들에게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베트남: 아시아의 반항적 식민지
기원전 100년경 중국의 지배 이전부터 홍강 유역에는 강력한 토착 문화가 존재했다. 권력은 많은 농민을 거느린 대지주인 부족 추장들이 쥐고 있었다. 중국이 이 지역으로 지배를 확장하면서 군사 구역으로 나누고 중국인 총독을 임명했다. 중국은 도로, 운하, 항구를 건설하고, 소와 같은 짐짐용 가축, 새로운 무기와 도구, 진보된 광업 기술을 도입했다. 약 1세기 동안 중국은 현지 추장들에게 일정한 권력을 유지하도록 허용했지만, 서기 1세기에 이르러 현지 영주들은 중국 관리들로 교체되었고, 중국은 목재, 귀금속, 진주, 상아 등 베트남의 방대한 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했으며 농민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는 토착 관습과 신앙을 탄압하고 유교 교육, 중국어, 심지어 중국식 의복과 머리 모양까지 강요함으로써 현지 주민들을 중국화하려 했다. 변화 중 일부는 유익하여 받아들여졌지만, 다른 변화는 매우 쓰라렸다. 중국에 대한 첫 대규모 반란은 서기 40년에 일어났으며, 남편이 중국인들에게 처형당한 귀족 여성 찌에우 착(Trung Trac)이 이끌었다.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현지 추장들의 무장 추종자들과 손잡고 여러 중국 요새를 함락하고 독립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3년 후 한나라 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자매는 처형되었다. 이후 베트남은 완전한 중국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에 시달렸다.
이후의 반란들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서기 939년, 응오 꾸옌(Ngo Quyen)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군대는 마침내 중국 정부를 타도하고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