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femme-dans-la-publicite.over-blog.com
기술의 진보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 문제가 해결되면서,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1950년대 프랑스에는 세탁기와 조리 기구 등 수많은 가전제품의 도움을 받는 '행복한 완벽 가정주부'의 모습이 등장했다. 이제 진보에 대한 찬가가 시작된 것이다.
기계들은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집안일을 대신하고 시간을 절약해 주었다. 전쟁 이전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변화들이었다. 전쟁 이후 기술적 기반이 한층 발전했기 때문이다. 근대화는 산업과 경제 구조 전반으로 확장되었으며,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모두에서 실질적인 성장 동력이 되었다.
전후 호황 이후 1차 산업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다. 농촌의 기계화와 농장의 현대화가 그 배경이었고, 눈에 띄지 않게 농촌 지역의 일자리는 서비스업으로 대체되어 갔다.
세계로 열린 유럽
기술의 발전과 함께 유럽은 대량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입할 여력을 갖추게 되었다. 소비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국경은 열리고 무역은 국제화되었으며, 생산성은 날로 높아졌다.
미국의 슈퍼마켓 모델을 본떠 1963년, 프랑스 최초의 하이퍼마켓(대형 할인점)이 파리 교외에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자주 비교되었고, 프랑스 제품들도 국제 교류의 일환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비 사회의 정착
국제 무역으로의 개방은 곧 소비주의로의 개방을 의미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장려받았고, 물가는 내리고 임금은 올랐다. 역시 미국 모델을 따라 제조 원가를 낮추는 데 성공하면서 '풍요'는 언론과 광고의 힘을 빌려 사회적 성공의 척도가 되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주부의 광고 이미지는 그 상징이었다.
게다가 실업은 잊혀졌다.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샀다. 계속 샀다. 모든 제품이 더욱 정교해지기만 했으니까. 소비 사회가 자리 잡았고, 광고는 거리의 벽을 뒤덮었으며, 판매원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갑을 열었다. 실제로 경제적 성공은 소비에 달려 있었다. 영광의 30년 시절, 사람들은 이미 과소비와 낭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영광의 30년, 그 종언
이 30년 동안 물가는 계속 하락했고 임금은 상승했다. 프랑스인들은 소비 사회의 매력에 빠져 상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며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물가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영광의 30년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 이유다. GDP는 순식간에 5% 이상 위축되었다.
기업들이 노동력을 아끼고자 기계로 부족분을 메우려 하면서 실업률도 다시 상승했다. 기업들은 질보다 양을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이촌향도 현상으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대도시로 몰리면서 주택난이 뒤따라 나타났다.
1973년, 첫 번째 석유파동이 닥쳤다. 소비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스위스에서는 석유 사용을 줄이기 위해 '차 없는 일요일'이 시행되기도 했다. 사회는 다시 결핍과 가난을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후퇴를 걱정했다. 그러나 사실 가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침묵으로 감싸왔을 뿐이다.
1980년대에는 SDF(주거 없는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가난이 다시 힘을 얻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직장도 거처도 없는 가장 취약한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물가를 낮춰준 값싼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저임금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혁명'
영광의 30년은 황금기였다. 사람들이 과소비하기 시작하고 생산성이 수요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생활 조건의 개선, 모든 이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던 기업들, 노동 시간의 단축, 더 긴 휴가… 그러나 소비주의는 임금이 기업의 생산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지는 순간, 그 해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이어진 것은 상당한 물가 상승이었다. 임금 인상은 이 30년의 영광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번영의 끝을 가져온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