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작센 보병 1806–1809… 오해받은 용감한 독일군

작센 보병 1806–1809… 오해받은 용감한 독일군

작센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입니다. 7년 전쟁 이후 프로이센의 영향권에 들어간 작센은 재앙적인 예나 전투(1806)가 일어날 때까지 프로이센 편에서 싸웠고, 이후 나폴레옹 진영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유럽 최고의 기병, 그러나 빛나지 못한 보병

작센군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정예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센 보병은 질적으로 큰 명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병력 자체는 양호하거나 우수한 수준이었음에도, 문제는 군 최고 지휘부와 보병 장교단의 역량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연대 편제

보병은 2개 대대로 구성된 연대 단위로 편성되었습니다. 각 대대는 머스킷 총병 4개 중대와 척탄병 1개 중대를 두었으며, 각 중대의 정원은 150명이었습니다. 척탄병 중대들은 소속 대대에서 분리되어 4개 중대씩 임시 척탄병 대대를 편성했습니다.

각 연대의 병력은 1,753명이었으며, 소규모 참모진을 거느린 대령이 지휘했습니다. 대대는 소령이, 중대는 중위의 보좌를 받는 대위가 지휘했습니다.

연대 전체 편제는 대령 1명, 소령 2명, 대위 10명, 중위 12명, 소위 8명, 하사 30명, 상등병 80명, 플루트 연주자 20명, 북수 30명, 공병 20명, 의무 요원 12명, 야영 장교 1명, 군법무관 1명, 대령 직속 참모 장교 3명, 척탄병 300명, 머스킷 총병 1,200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각 중대의 최고 사수들은 당시의 용어로 '헌터(Jäger)', 즉 저격수 부대를 이루었습니다.

제복과 장비

보병은 흰색 상의와 칼라를 착용했고, 소매 끝과 옷깃에는 각 연대의 고유 색상이 배치되었습니다. 머스킷 총병은 검은색 모자를 썼고, 척탄병은 특징적인 높은 모피 모자를 썼습니다. 또한 검은 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검은 부츠를 신었습니다.

부사관과 병사들은 가죽 재질의 흰색 장구를 착용했으며, 여기에 60발을 수납할 수 있는 검은 나무 탄약통을 매달았습니다. 부사관은 권총을 휴대했고, 머스킷 총병과 척탄병은 1.5m 길이의 프로이센식 머스킷과 45cm 총검을 장비했습니다.

모든 병사는 작은 검을 차고 다녔으며, 부사관은 여기에 더해 미늘창과 병사를 징계할 때 사용하던 특징적인 곤장을 지녔습니다. 장교들도 대체로 같은 제복을 입었지만, 더 넓은 은색 허리띠를 두르고 계급에 따라 높은 승마 부츠나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특히 척탄병의 하급 장교들은 부하들처럼 머스킷을 소지했습니다. 중위 계급까지의 다른 장교들도 미늘창과 검을 지녔으며, 그보다 위 계급의 장교들은 검만을 차고 다녔습니다.

프로이센식 훈련과 전술

작센 보병은 프로이센식 교범에 따라 훈련되었습니다. 3열 종심의 선형 대형으로 싸우며 적에게 연속 일제 사격을 퍼붓고, 적이 밀릴 기미를 보이면 즉시 총검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적 기병에 대해서는 방진(스퀘어)을 형성해 대응했습니다. 다만 작센 보병은 밀집 종심 대형을 활용한 공격 전술로 싸우도록 훈련받지 않았습니다.

귀족 장교와 병사 사이의 벽

작센 보병의 가장 큰 약점은 귀족 출신 장교들과 부사관·병사들 사이의 정신적 거리였습니다. 그 결과 보병은 전투에서 충분히 능숙하고, 어쩌면 프로페셔널하다고 할 만했지만,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 수 있는 불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작센 보병이 참전한 예나 전투에서 그들은 훌륭하게 싸웠습니다. 빙켈 척탄병 대대는 프랑스 기병과 경보병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방진 대형을 유지하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해, 프랑스군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예나 이후: 프리틀란트까지

예나 전투 이후 작센은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작센군은 1810년 프랑스식 모델에 따라 개편될 때까지 기존 방식 그대로 편성되고 싸웠습니다. 작센 보병은 1807년 프로이센·러시아에 대한 전역에 계속 참전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바그람의 희생, 인정받지 못한 용맹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작센군은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의 지휘 아래 싸웠습니다. 유명한 바그람 전투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훈련 수준을 고려하면 충분히 잘 싸웠으며, 보병은 50%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오만한 나폴레옹에게 결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