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나였지만 승자는 폴란드였다
1667년 포다이체(현 우크라이나 피드하이치)에서 벌어진 포다이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당시 폴란드 장군이던 얀 소비에스키는 불과 3,000명의 정규병만으로 10배가 넘는 적을 격퇴하며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분할과 도로셴코의 배신
1667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안드루소프 휴전 협정을 체결하며 우크라이나를 양분했습니다. 그러나 코사크 수령 페트로 도로셴코는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튀르크(오스만 제국)와 손잡고 술탄의 속국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불안정한 삼각 동맹의 결성
튀르크는 자국의 속국인 크림 타타르에게 도로셴코 지원을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서부 우크라이나에는 15,000명의 코사크, 18,000명의 타타르, 3,000명의 예니체리로 구성된 약 36,000명의 대연합군이 집결했습니다.
소비에스키의 결사적 대응
이에 맞서 소비에스키는 단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역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의외의 지원군이 합류했습니다. 바로 갈리치아 지방의 정교회 신도, 루테니아 농민 약 6,00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튀르크와 타타르보다는 폴란드를 택한 것입니다.
소비에스키는 포다이체에 진영을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습니다. 1667년 10월 4일, 코사크·타타르·튀르크 연합군이 드디어 이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전투 시작
이틀 뒤, 아딜 기레이 칸이 이끄는 타타르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소비에스키 군은 경량 화포를 포함해 총 18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군과 루테니아 민병대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 과감하게 역공을 감행해 적을 밀어냈습니다.
이후 며칠간 세 동맹군은 소비에스키 부대를 측면에서 돌파하려 시도했지만, 끊임없이 기동하며 방어선을 재편하는 폴란드군 앞에서 모든 공격이 좌절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원인은 코사크·타타르·튀르크가 서로 작전을 조율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포위와 협상
그럼에도 연합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앞세워 소비에스키를 압박했고, 결국 그는 포다이체 성 내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은 그를 포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리멸렬한 공성전 끝에 도로셴코는 소비에스키와 협상을 결심했고, 합의에 따라 타타르·튀르크·코사크 연합군은 철수했습니다.
폴란드 왕좌로 가는 첫걸음
이 대승의 공로로 소비에스키는 대헤트만(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폴란드 왕위에 오르는 위대한 여정의 첫발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