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정복자 윌리엄 1세: 사생아에서 잉글랜드 왕이 된 남자

정복자 윌리엄 1세: 사생아에서 잉글랜드 왕이 된 남자

윌리엄 더 배스터드(William the Bastard), 즉 정복자 윌리엄 1세(William I the Conqueror)는 팔레즈(Falaise) 근교에서 1027년경 태어나 1087년 루앙(Rouen)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Normandy, 재위 1035~1087)이자 잉글랜드 국왕(King of England, 재위 1066~1087)으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 '악마공(Robert le Diable)'과 팔레즈의 무두장이 딸 아를레트(Arlette)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사생아의 고난, 12년의 혼란기

1034년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 로베르 공작은 노르만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윌리엄을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이듬해인 1035년 공작이 사망하면서 윌리엄은 실질적으로 공작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미성년기는 심각한 혼란으로 점철되었다.

사생아라는 신분은 적대 세력에게 빌미가 되었고, 어린 공작의 권위는 노르만 귀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무시당했다. 피비린내 나는 무정부 상태가 무려 12년간 지속되었으며, 용맹한 길베르 드 브리온느(Gilbert de Brionne)를 비롯한 어린 공작의 후견인들은 차례차례 암살당했다. 리샤르 1세와 리샤르 2세의 후손들은 새 공작에 대한 멸시를 숨기지 않은 채 반란의 불씨를 지폈고, 브르타뉴인들과 프랑스 왕 앙리 1세(Henri I) 역시 이 소동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권력의 마비는 사실상 완전한 수준에 이르렀다.

발 데 뒨 전투와 권력의 회복

한편 앙리 1세는 벡셍(Vexin) 지역을 되찾으려 하고 공국 내부의 히스무아(Hiesmois) 지방까지 유린하는 등 노르망디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1046년 하노르망디에서 기 드 브리온느(Gui de Brionne)가 주도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반전된다. 기 드 브리온느가 승리할 경우 부르고뉴 연계의 노르만 제후국이 수립되어 왕령지에 치명적 위협이 될 것을 우린 앙리 1세는 윌리엄의 편에 섰던 것이다.

주군의 도움 덕분에 1047년 오른 강(Orne)과 디브 강(Dives) 사이 발 데 뒨(Val-des-Dunes)에서 반군을 격파한 윌리엄은 드디어 권위를 재확립했다. 그는 베생(Bessin)과 코탱탱(Cotentin) 자작령 등 반란 가담자들의 재산 일부를 몰수하고, 다수의 귀족들에게 성에 공작 직속 수비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으며, 나아가 같은 해 카앙(Caen)에서 선포한 '신의 평화(Peace of God)'를 모든 이에게 준수시켰다.

모범적 봉건 국가, 노르망디의 건설

1060년까지 윌리엄의 활동은 노르망디에 엄격한 봉건 체제를 확립하여 공작 자신에게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남기는 데 집중되었다. 특히 기사들에게 매우 엄격한 40일 군 복무를 의무화한 '갑옷봉읍(hauberk fief)' 제도를 통해 그는 머지않아 대규모 군대를 확보했다. 또한 역동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변경을 요새와 영토로 보강했다.

특히 강력하고 위험한 적수였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마르텔(Geoffroi Martel)과 맞서 알랑송(Alençon)과 돔프론(Domfront)을 탈환했고, 1052년에는 남부 노르망디의 관문을 쥔 벨렘领主(lord of Bellême)에 대해 종주권을 확립했다. 팽창은 마옌(Mayenne) 합병으로 마무리되었다.

공작 행정도 개혁되었다. 윌리엄은 수도를 팔레즈에서 공국 중심부에 더 가까운 카앙으로 옮기고 그곳에 공작 성을 건설했다. 아울러 클뤼니 개혁파만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노르만 교회의 영적 갱신을 추진해 많은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냈다.

교황을 거스른 결혼

그러나 1050년 플랑드르 백작의 딸 마틸다(Mathilde)와의 결혼에서 그는 교황과 자문관이며 노르망디 종교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랑프랑(Lanfranc)의 만류를 모두 무시하고 근친혼을 강행한다. 파문까지 당한 부부는 참회의 의미로 카앙에 두 개의 교회, 즉 남자 수도원(Abbaye aux Hommes)과 여자 수도원(Abbaye aux Dames)을 세워야 했다.

잉글랜드 정복, 헤이스팅스의 한 번의 전투

모범적인 봉건 국가로 노르망디를 재조성한 윌리엄은 이제 야심 찬 계획을 구체화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노르만 출신인 로베르 드 쥐미에주(Robert de Jumièges)의 개입 덕분에, 자식 없는 외사촌형이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왕인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를 설득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앵글로색슨 지도자들의 회의는 서식스 백작 해럴드(Harold)를 후계자로 선출한다. 윌리엄은 우연한 폭풍우로 퐁티외(Ponthieu) 해안에 표류한 해럴드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놓았는데, 그는 이를 위반(배신)이라 규정하고 잉글랜드 침공 계획에 대해 교황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의 지지를 끌어냈다.

생발레리쉬르솜(Saint-Valéry-sur-Somme)을 출발한 원정군은 1066년 9월 29일 서식스의 페번지(Pevensey)에 상륙했고, 이듬날인 10월 14일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경쟁자 해럴드를 격파했다. 질서정연한 군 조직과 활의 위력이 빛을 발한 단 한 번의 전투를 통해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주인이 되었다.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던 그는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관용에서 철권으로

윌리엄의 프로파간다는 정통성(legitimacy)이라는 명분에 기반했다. 초기 그는 색슨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배신자로 간주된 자들의 재산만을 몰수했고, 1067년 2월에는 잉글랜드 통치를 세네슈칼 윌리엄 핏츠오번(William FitzOsbern)과 이복형이자 바이외 주교인 외드(Odo of Bayeux)에게 맡긴 채 개선의 기세로 노르망디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장악한 것은 잉글랜드의 남부와 서부뿐이었고, 스칸디나비아의 침공 위협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영지를 하사받은 여러 노르만 봉신들의 충성은 불안정했다. 곧 불로뉴의 외스타슈(Eustace of Boulogne)가 선동한 반란으로 잉글랜드로 소환되었으나, 그의 위상이 워낙 높았던 탓에 오히려 앵글로색슨인들이 그를 지지하여 해럴드의 세 아들이 이끄는 침공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색슨 귀족 에드윈(Edwin)과 모르카르(Morcar) 두 백작의 반란은 북부 백작들을 정복할 명분이 되었다. 이 초동 경고에도 그의 관용 정책은 유지되었지만,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방침은 급격히 바뀌었다. 1069년 에드거 아델링(Edgar Atheling)을 왕으로 추대한 북부 잉글랜드인들의 반란을 그는 잔인하게 진압했다. 원군으로 온 덴마크 함대를 철수시키고, 험버(Humber)와 타인(Tyne) 백작 지역에서 초토화 작전을 감행해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1072년에는 용병들을 해고할 수 있었다.

1075년에는 노르만·브르타뉴 대귀족들(충신 윌리엄 핏츠오번의 아들들인 라울 드 가엘과 로저 드 헤리퍼드 포함)의 새로운 음모가 외드 드 바이외에 의해 좌절되었고,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던 색슨 백작 월더프(Waltheof)는 참수당했다. 이후 색슨인들은 모든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고 사실상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 넓은 토지를 지킨 색슨 대지주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사(sheriff) 자리는 노르만 귀족들이 차지했고, 색슨 출신 성직자 대부분도 물러났다. 1070년 윌리엄은 색슨계 스티강드(Stigand)를 대신해 친구 랑프랑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했다.

영국 봉건제의 확립과 둠즈데이 북

노르만 귀족들을 위해 윌리엄은 '호너(honour)'라고 불리는 대규모 봉읍 집단을 조성했다. 한 덩어리가 아니라 왕국 각지에 흩어진 토지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그 결과 양쪽 해협에서 군주로부터 발원하는 봉건 체제는 곧 동일해졌다. 잉글랜드에서는 이것이 기존 색슨의 '매너(manor)' 조직 위에 얹혔다. 그 체계의 핵심은 왕의 '직접 봉신(tenant-in-chief)'들로, 이들은 '기사 봉읍(knight's fief)'을 보유한 자신의 기사들을 통해 왕에게 복무를 지었다.

1086년에 작성된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은 잉글랜드 왕국의 토지 재산을 조사·등록한 것으로, 이 영토적 격변의 결과를 보여준다. 인구는 이제 노르만·프랑스계 귀족과 그들에게 예속된 색슨 민중, 이렇게 뚜렷이 구분된 두 계층으로 나뉘었고, 자유민의 신분은 반농노로 격하되었다. 마지막으로 윌리엄은 신민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솔즈베리 맹세(Salisbury Oath)'이다. 이 정교한 조직에 힘입어 그는 시간의 절반을 노르망디에서 보낼 수 있었다.

말년과 유산: 두 왕관의 분열과 재결합

대륙과 섬을 아울러 반쪽씩 차지한 윌리엄의 군주정은 모든 면에서 대립하는 카페 왕조(Capetian)와 충돌을 거듭했다. 말년의 그는 여러 차례 배신과 싸워야 했다. 1078년 프랑스 왕은 그의 아들 로베르 커더호스(Robert Curthose)의 반란을 지원했으며, 암약을 일삼던 이복형 외드 드 바이외는 1082년 체포되어 루앙 성탑에 유폐되었다. 윌리엄 본인은 1087년 9월 9일, 프랑스 도시 망트(Mantes)에 대한 응징 원정 중 사망했다.

그는 두 왕관의 결합이 일시적일 것이라 여기고, 카롤링 왕조의 예를 따라 임종 직후 영토를 유산으로 분배했다.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여긴 노르망디는 장남 로베르 커더호스에게, 획득재로 취급한 잉글랜드는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에게 돌아갔다. 세째 아들, 훗날의 앙리 1세 '학자왕(Beauclerc)'은 현금과 모랭(Mortain) 백작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업을 완성하고 계승한 것은 바로 이 아들이었다. 1087년 깨졌던 노르망디와 잠글랜드의 통합은 1106년, 윌리엄 루퍼스의 죽음과 로베르 커더호스의 무능을 교묘히 이용한 이 총명한 군주에 의해 회복된다. 팅셰브레(Tinchebray) 전투에서 동생 로베르를 격파한 앙리 1세는 그를 평생 포로로 붙잡아 두었다.

이렇게 탄생한 앵글로노르만 국가는 12세기에 들어 앙주와 아키텐까지 판도를 넓혀 1204년 필리프 오귀스트(Philippe Auguste)가 이 위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기 전까지 프랑스에 심각한 위험 요소로 존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