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우주 여행의 '예언자' 치올코프스키: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가능하게 만든 이론의 아버지

우주 여행의  예언자  치올코프스키: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가능하게 만든 이론의 아버지

1969년 7월 20일,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 순간은 우주 탐사와 유인 우주 비행 역사의 위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달로 가는 길은 길고 험난했으며, 그 성공의 토대를 마련한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러시아의 수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Konstantin Tsiolkovsky)다.

스푸트니크 발사 뒤에 있던 이론가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R-7 로켓을 통해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스푸트니크 1호는 인류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우주 경쟁에서 뒤처질까 두려워한 미국에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론 우주항행학의 아버지로 꼽는 치올코프스키가 길을 닦지 않았더라면 스푸트니크의 발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SF 작가 아서 C. 클라크에게조차 영감을 준 인물이다.

"스푸트니크를 만든 소련 로켓 설계 세대에 끼친 치올코프스키의 진정한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포덤 대학교 교수이자 우주 탐사 전문가인 아시프 시디키(Asif Siddiqui)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꿈꾼 우주

치올코프스키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고, 이 점은 훗날 공산 정권이 내세우며 강조한 사실이기도 했다. 혁명적 정치 활동으로 러시아로 추방된 폴란드 애국자였던 아버지와 교양 있는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1857년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칼루가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그는 성홍열에 걸렸고, 고열로 인해 심각한 청각 장애를 겪게 되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배움을 이어갔으며, 그는 이를 나중에 자랑스럽게 여기며 "책 외에는 나에게 다른 스승은 없었다"고 말했다.

10대 후반이 되자 그는 모스크바로 옮겨가 유명한 루먼체프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쥘 베른(Jules Verne)의 작품들을 만났다. 『지구에서 달까지』, 『혜성여행』 등 베른의 우주 모험 소설들은 당시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치올코프스키는 그가 묘사한 로켓 추진, 우주 여행, 달 방문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단순히 감탄만 한 것이 아니라, 베른이 『지구에서 달까지』에서 묘사한 거대한 대포로 사람을 달로 쏘아 올리는 방식은 극단적인 가속력 때문에 승객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논증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만의 추진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지구 중력을 벗어나 우주 여행에 나서려면 액체 연료와 추력·속도·질량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이론은 훗날 '치올코프스키 방정식', 즉 '이상 로켓 방정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계산은 로켓을 우주 여행에 사용한다는 최초의 과학적으로 타당한 제안으로 평가받으며, 현대 로켓 과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SF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과학자

베른에게서 영감을 받은 치올코프스키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아이디어'가 어떤 과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널리 알리기 위해 직접 SF 창작에도 손을 댔다. 1892년의 작품 『달 위의 사람』에서 주인공은 열병 상태에서 꿈속으로 친구와 함께 달에 가 보는데, 차가움과 어둠, 무중력 상태는 물론 달의 부피와 밀도가 더 작기 때문에 달에 작용하는 중력이 지구보다 6분의 1 수준이라는 설명 등 마치 과학 강의 같은 디테일까지 담아냈다.

1895년의 『지구와 하늘의 꿈』에서는 인류의 우주 식민화를 그리면서 소행성 채굴과 우주 온실의 스케치까지 언급했다. 시디키 교수는 그의 이야기들이 문학적 미적 가치가 높지는 않지만 "우주 여행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적 도구였다"고 평가한다.

치올코프스키는 러시아 코스미즘이라는 유토피아적 철학 이론도 믿었다. 인간부터 극미량의 모래 알갱이까지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떤 수준의 의식을 지니며, 인간이 죽으면 그 의식은 우주로 옮겨져 지구에서 먼 행성에서 다시 부활할 준비를 한다고 보는 종교철학 학파였다. 이 이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가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지만, 요람 속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라고 쓰도록 만들었고, 이 문장은 훗날 칼 세이건(Carl Sagan)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생전의 무명, 사후의 영광

오늘날 러시아에서 그의 저술과 우주 여행 연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치올코프스키는 평생 대부분을 무명 속에서 보냈다. 액체 추진제와 우주 식민화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는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고, 권력층과 인연이 없으며, 그의 비전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는 이유로 과학계에서 자주 외면당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을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국가적 자부심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새 정권에 그의 소련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1920년대, 환갑을 넘긴 나이였던 치올코프스키의 저작 수백만 부가 인쇄되어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1920~30년대,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개척자들이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 치올코프스키는 "우주 탐사가 가능하다"고 국민들에게 말하며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실제로 몇십 년 후 미하일 티호노라보프, 발렌틴 글루슈코,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같은 인물들은 '치올코프스키 방정식'을 기반으로, 그의 SF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최초의 인공위성과 최초의 인간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우주 시대의 위대한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소련 우주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긴 다음 세대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우주항행학 교수 마이클 그런트먼(Michael Gruntman)은 이렇게 말한다.

치올코프스키는 1935년 9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던 칼루가의 집은 오늘날 그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우주 엘리베이터와 우주복의 아이디어를 처음 구상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우주를 꿈꾸고 별을 향해 손을 뻗는 법을 가르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다.


출처: iefimerida.g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