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히틀러를 위해 싸운 최초의 덴마크·노르웨이 자원병들: '덴마크' 군단과 '노르웨이' 의용군단

히틀러를 위해 싸운 최초의 덴마크·노르웨이 자원병들:  덴마크  군단과  노르웨이  의용군단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 투입할 자원병을 모집했습니다. 1941년 6월 28일, 자발적 참여로 구성된 '자유군단 덴마크(Freikorps Danmark)'가 창설되었고, 초기에는 480명의 덴마크인이 배속되었습니다. 이들은 친위대(SS) 제복을 지급받아 함부르크로 보내져 훈련을 받았으며, 1941년 말에는 총 1,160명 규모의 두 개 대대를 갖추고 동부 전선 파견 준비를 마쳤습니다.

덴마크 자원군단의 창설과 지휘부 교체

덴마크인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리싱이 초대 지휘관을 맡았으나, 나치에 완전히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2년 해임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독일계 출신이자 나치 신봉자였던 덴마크인 크리스티안 폰 샬부르크가 지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군단은 처음에 제3친위대 사단 '토텐코프(Totenkopf, 해골)'에 배속되어 북부 집단군과 함께 북방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데먄스크 포위전과 라무셰보 전투

독일군이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패배한 뒤, 소련군은 1942년 초 레닌그라드 지역에서도 반격에 나서 독일군 6개 사단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먄스크 포위권(Demyansk Pocket)'입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끝까지 버텼고,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구원 작전이 계획되었습니다. 자유군단 '덴마크'도 이 구원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습니다.

덴마크인들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곳은 라무셰보(Ramushevo)였습니다. 이들은 포위된 독일군이 탈출할 수 있게 해준 '회랑'을 열어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스탈린의 강압적인 지시에 몰린 소련군은 비정형적인 전술로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덴마크인들 역시 사상자를 냈는데, 지휘관 샬부르크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후 군단은 본국으로 돌아와 결손을 메우고 재편성되었습니다.

벨리키예루키 전투와 군단의 해체

군단은 1942년 10월, 덴마크 주재 장교 출신인 크누드 마르틴센(Knud Martinsen)의 지휘 아래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그는 전후 덴마크에서 반역죄와 전쟁범죄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군단은 라트비아로 파견되어 벨리키예루키 대전투에 참가했으나, 소련군은 이들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군단은 해체되었지만, 상당수 대원들이 새로 창설된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에 합류했습니다. 이 사단 산하의 덴마크인 연대는 종전 때까지 독일 편에서 싸웠습니다. 군단이 존속한 기간 동안 총 6,000명이 넘는 덴마크인이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르웨이 의용군단

노르웨이에서는 전쟁 이전부터 악명 높은 반역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이 주도하는 친독일 운동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점령 이후, 1,300명 규모의 의용군단이 창설되었습니다. 초대 지휘관은 모험가 출신의 핀 킬스트루프(Finn Kjelstrup) 대령이었지만, 그는 독일 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 물러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저명한 승마 선수였던 아르투르 크비스트(Artur Kvist) 소령이 지휘관직을 맡았습니다.

군단은 1942년 2월 레닌그라드 전선에 파견되어 제1친위대 여단 및 스페인 '청색사단(디비시온 아술)'과 함께 전투를 벌였습니다. 특히 우리츠크(Uritsk) 마을 전투는 매우 격렬했습니다. 소련군은 노르웨이 방어 구역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지만, 낡은 전술 탓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전차 지원에도 불구하고 차례차례 격퇴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노르웨이인의 전사자는 단 10명에 불과한 반면, 소련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군단은 레닌그라드 지역에서 계속 전선을 유지하다가 1943년 봄 해체되었고, 600명의 대원들이 덴마크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 사단에 합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