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대범죄 75년 후, 다하우 수용소의 인간과 짐승들

대범죄 75년 후, 다하우 수용소의 인간과 짐승들

전범의 무덤을 지키는 옛 이웃

뮌헨 근교의 조용한 마을 펠다핑(Feldafing). 우리는 이곳에서 나치 친위대(SS) 출신 의사 하인리히 슈츠(Heinrich Schütz)의 흔적을 쫓고 있다. 그는 종전 후 재판을 받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1명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지만, 법정에서 입증된 것은 이뿐이었다. 실제 그의 희생자는 훨씬 많았다.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의학 실험을 강요당한 수용소 포로들이었다.

놀랍게도 슈츠의 옛 이웃 한 사람이 지금도 그의 무덤을 돌보고 있다. 그는 슈츠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죠!” 그는 우리의 질문에 즉답했다.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늘 다정하셨거든요…” 우리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들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성직자 말살 정책

1939년 9월. 당시 23세였던 카지미에시 마단스키(Kazimierz Madański)는 폴란드에서 신학 과정을 거의 마친 참이었다. 독일 점령군은 폴란드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고, 성직자와 사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단스키 역시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다하우로 이송되었다. 1940년부터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2,700명이 넘는 사제와 성직자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이 가운데 1,700명 이상이 폴란드인이었으며, 절반 이상은 끝내 생환하지 못했다.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사제들

다하우 역시 다른 강제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의학 실험이 자행되는 부서를 갖고 있었다. 1940년 봄, SS 의사 하인리히 슈츠가 다하우에 도착했고, 불과 2년 만에 해당 부서의 책임자로 올라섰다. 그는 상처 부패와 염증 관련 실험을 담당했는데, 치료에는 당시에도 효과가 없다고 여겨진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다하우에서 실험 대상이 된 주요 집단은 바로 사제들이었다. “상대적으로 건강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건강한 몸이어야 실험 결과를 비교적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들에게 포로는 단지 ‘실험용 기니피그’

1942년 11월. 카지미에시 마단스키와 하인리히 슈츠가 수용소 병원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다. 20명의 사제가 의학 실험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이후 24시간 안에 목숨을 잃었다. 마단스키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고, 죽음이 머지않았다. 실험 책임자 슈츠는 환자들 곁에 가장 먼저 다가갔다. 간호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정확한 기록을 받아 적었다. 물론 포로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에 그들은 그저 실험용 기니피그에 불과했다.

다하우의 ‘천사’, 하이니

독일인 정치범들, 특히 사회민주당원과 공산주의자들이 간호사와 보조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수석 간호사 하인리히 슈테어도 있었다. 포로들은 그를 ‘하이니’라고 불렀다. 고통스러운 수술 뒤 잠에서 깬 마단스키는 하이니의 미소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상처가 썩어가며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다. “내가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몰래 특효약을 건넸다. 슈테어는 다른 포로들마저 은밀히 치료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명을 구해냈다.

해방 이후, 남겨진 감사의 마음

마단스키는 1945년 4월 29일 수용소 해방의 순간까지 살아남았다. 이 날짜는 그의 삶에 영원히 새겨졌다. 30년 후, 공산권 폴란드 당국은 슈체친 교구 주교가 된 그의 평생 업적인 바르샤바 신학연구소 설립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주교는 구명의 은인에게 직접 감사를 전하지 못했다. ‘하이니’는 이미 1958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카 이름가르트 푀르스터는 마단스키가 하이니의 무덤을 찾아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당신의 삶은 투쟁이었고, 당신의 일은 선함으로 가득했으며, 당신의 사람을 향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출처: DW(도이치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