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게 가장 참담한 결과를 안겨준 전투였다.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그리고 일부 독일 국가들로 구성된 연합군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패배 후 보나파르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로 향했는데, 이는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부대를 재편성하고 보충하려는 목적이었다.
하나우 전투, 승패와 무관한 '정치적 승리'
라이프치히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독일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남겨진 독일 동맹국들—혹은 무력으로 '동맹'이 되었던 국가들—은 연합군 진영으로 선회했다. 그동안 프랑스의 충성스러운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도 더는 연합군의 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진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하나우(Hanau)에서 벌어진 전투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승패와 관계없이 바이에른이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던 정치적 전투였던 것이다.
퇴로 차단 작전과 프레다의 이중 오판
바이에른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자,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퇴각로를 끊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과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가 편성되었고, 지휘관은 바이에른의 카를 폰 프레다(Karl von Wrede) 장군이 맡았다. 프레다의 병력은 오스트리아군 24,000명과 바이에른군 18,000명, 총 42,000명(보병 33,000명, 기병 9,000명, 포 94문)에 달했다. 프레다는 프랑스 잔여 병력이 전력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사기가 꺾인 병력이 20,0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두 가지 계산은 모두 빗나갔다.
퇴각 중 재정비된 프랑스군
라이프치히에서 실제로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마술 같은' 손길 아래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재정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나우에서 나폴레옹이 운용 가능한 병력은 약 30,000명이었다.
1813년 10월 29일, 프레다는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하나우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병력—오스트리아 보병사단 2개와 바이에른 보병사단 2개, 오스트리아 기병사단 1개, 바이에른 기병여단 1개—을 마인강 지류인 킨치히 강 앞쪽 비교적 좁은 정면에 깊은 종대로 배치했다. 또한 주 방어선 전방의 람부아 숲에는 경보병 사단들을 전진 배치했다.
기병은 제2선에 놓였고, 포병은 보병 전면에 전개되었다. 프레다는 우익을 하나우 시에, 좌익은 인근 습지대에 각각 의지시켰다. 그러나 프레다의 실수는 강을 등지고 병력을 배치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후퇴하거나 최전선을 증원해야 할 경우 필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배치였다. 한편 나폴레옹은 첩보망을 통해 적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비했다.
나폴레옹의 전투 준비
나폴레옹은 수송대와 병력의 3분의 1을 다른 경로로 먼저 보낸 뒤, 결전에 대비해 전열을 정비했다. 좌익에는 빅토르(Victor) 원수의 제2군단(보병사단 1개)을, 중앙에는 마크도널드(Macdonald) 원수의 제11군단(보병사단 1개)과 드루오(Drouot) 휘하 근위 보병 2개 사단 약 6,000명, 그리고 근위 기병 4개 사단 약 4,000명을 배치했다. 우익 제2선에는 세바스티아니(Sebastiani) 장군의 제2기병군단 약 3,000명을 두었다. 나폴레옹은 마크도널드와 근위대에게 람부아 숲을 소탕하게 한 뒤, 주력을 연합군의 좌익과 중앙으로 집중 투입하려 했다.
전투의 경과 – 프랑스군의 압도적 돌격
10월 30일 전투가 시작되었고, 처음부터 흐름은 나폴레옹에게 유리하게 굴러갔다. 정오까지 근위대는 숲을 소탕했고, 프랑스군은 황제가 구상한 대로 전열을 갖추었다. 프랑스군은 연합군 중앙에 포 50문을 집중 사격해 그곳에 배치된 연합군 포 28문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프랑스군이 일제히 돌격에 나섰고, 연합군의 전선은 버티지 못했다. 프레다가 최전선을 증원하려 했으나, 현장의 유일한 다리를 통해 킨치히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혼란이 빚어졌다.
그럼에도 프레다는 직접 최전선에 개입해 선두 부대들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전열을 구성함으로써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는 후퇴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에게 생존의 길, 즉 귀환로를 열어주었다. 전투는 여기서 끝났다. 패배한 연합군의 손실은 사상자 9,000명(전사·부상·포로)에 달했으며, 프랑스군의 직접적인 손실 역시 6,000명으로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 패배로
불행하게도 나폴레옹에게 퇴각 중이던 군대는 이른바 '피로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더욱 와해되었고, 이후 며칠 사이 프랑스 병사 10,000명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함정에서 탈출했지만, 전술적 성공은 전략적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5일 뒤 연합군은 프랑크푸르트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자국 영토 내에서 몇 달을 더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여 항복을 강요당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나우 전투의 한 장면. 바이에른 용기병(dragoons)이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