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아메리카에서 가발 제작은 흔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 주민들은 단순한 헤어스타일로 만족하거나,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럽—주로 런던—에서 수입한 가발을 착용했습니다. 숙련된 가발 장인 자체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가발이 필요한 사람들은 해외 수입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견습공은 얼마나 일해야 했을까?
만약 누군가 식민지 시대에 가발 제작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면, 긴 시간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당시 장인 견습 제도의 관례에 따르면 견습 기간은 통상 7년이었습니다. 이는 가발 제작뿐 아니라 목공, 인쇄, 대장장이 등 대부분의 직업에 공통으로 적용되던 표준이었습니다. 견습공은 그 기간 동안 스승 밑에서 머무르며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노동력을 바치고, 그 대가로 기술을 하나씩 익혀 나가야 했습니다.
가발은 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나?
18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가발은 단순한 유행 아이템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습니다. 판사, 변호사, 고위 관료, 부유한 상인들이 가발을 즐겨 착용했으며, 특히 가루를 뿌린 흰색 가발(powdered wig)은 권위와 품격을 나타내는 필수 아이템이었습니다. 다만 가발 한 개의 가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평범한 농부나 노동자에게는 감히 손대기 어려운 사치품이었습니다.
식민지에 가발 장인이 적었던 이유
아메리카 식민지는 여전히 개척 초기 단계였고, 정교한 수공업 기술을 갖춘 장인 인구가 크게 부족했습니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같은 큰 도시에는 소수의 가발 장인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부유층은 런던에서 가발을 직접 수입하는 방식을 선호했고, 이는 식민지 내 가발 제작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유행은 미국 독립전쟁 이후 빠르게 사그라들었습니다. 가발이 영국 귀족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새로운 공화국의 시민들은 이를 멀리하게 되었고, 가발 제작이라는 직업 역시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