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년대 중반, 영국 정부는 7년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일련의 조세법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 아래 강력히 저항했고, 결국 여러 법안을 철폐하거나 수정하게 만들었습니다.
1. 설탕법과 인지세법(1764~1765)
설탕법(Sugar Act, 1764)
영국은 1764년 설탕법을 통해 설탕과 당밀 수입 관세를 조정하고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식민지 상인들은 밀수와 비협조로 대응했으며, 이러한 저항 분위기는 이후 더 큰 반영 운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지세법(Stamp Act, 1765)
- 식민지 주민들은 시위, 집회,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습니다.
- 급진적 식민지 주민들의 모임인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은 인지세 징수관과 영국 관리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 상인들은 영국 상품 수입을 거부하여 영국 상인과 제조업자들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 각 식민지 의회는 인지세법을 규탄하고 그 법적 효력을 부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 9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인 '인지세 회의(Stamp Act Congress)'는 국왕과 의회에 항의 청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압박 끝에 영국 의회는 1766년 인지세법을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2. 타운젠드법(1767)
- 식민지 주민들은 다시 한번 시위와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 '자유의 딸들(Daughters of Liberty)'로 불린 여성들은 물레질 행사를 열고 자급 자수한 옷을 입는 등 소비 절제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 불수입 협정(non-importation agreements)으로 영국의 식민지 수출이 급감하며 영국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 각 식민지 의회는 타운젠드법을 규탄하고 그 법적 효력을 부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 새뮤얼 애덤스가 작성한 '매사추세츠 순환 서한(Massachusetts Circular Letter)'은 식민지가 연합하여 영국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며 각지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1770년 유리, 페인트, 종이, 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세를 철폐했습니다.
3. 보스턴 학살 사건(1770)
보스턴에서 영국 병사들과 주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영국군이 발포하여 식민지 주민 5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식민지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고 저항 여론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보스턴 차 사건(1773)
모호크족으로 변장한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한 영국 선박에 올라 차법(Tea Act)에 항의하며 차 342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으며, 영국 의회가 '강압법(Coercive Acts)', 이른바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5. 퀘벡법(1774)
퀘벡법은 퀘벡주의 영토를 확장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많은 식민지 주민들은 이를 자신들의 개신교 신앙에 대한 위협이자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한 영국의 편애로 여기며 격분했습니다.
6. 제1차 대륙회의(1774)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과의 심화되는 위기를 논의하고 식민지의 저항을 조율했습니다. 회의는 영국 정책에 대한 식민지의 불만을 담은 '권리와 불만의 선언(Declaration of Rights and Grievances)'을 채택했으며, 영국 상품 불매운동과 자위를 위한 민병대 조직에도 합의했습니다.
결론
식민지 주민들은 시위, 불매운동, 경제적 압박, 정치적 결의 등 다층적인 저항 전략을 통해 영국 정부에 실질적인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인지세법의 폐지와 타운젠드법 관세의 일부 철폐는 이러한 노력의 성과였지만, 동시에 양측의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 결국 미국 독립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