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인근 멜룬(Melun), 센에마른(Seine-et-Marne) 주에 자리한 보르비콩트 성(Château de Vaux-le-Vicomte)은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의 전형이자, 훗날 베르사유 궁전의 직접적인 원형이 된 걸작입니다. 1656년, 루이 14세의 재무총감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의 명으로 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 화가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라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합심해 탄생시켰습니다. 광활한 테라스 앞에 펼쳐진 르 노트르의 정원, 그리고 1661년 8월 17일 열린 호화로운 축제는 푸케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5년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이 성은, 한 권력자의 꿈에서 시작해 혁명과 방치, 그리고 한 가문의 헌신적인 복원을 거쳐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유산 중 하나로 우뚝 서 있습니다.
푸케의 보르비콩트: 권력과 예술의 정점
1653년 재무총감에 오른 니콜라 푸케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저택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1641년 보르비콩트 영지를 매입한 후, 동갑내기 세 거장 르 보, 르 브룅, 르 노트르와 함께 프랑스 브리(Brie) 지방에 전례 없는 규모의 영지를 조성했습니다. 1656년부터 5년간 1만 8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성의 이름을 딴 마을을 포함해 세 개의 마을이 철거되었으며, 인근 망시(Maincy)에는 태피스트리 공방까지 세워졌습니다. 푸케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섬세함에 대한 본능적 안목을 지닌 현명한 주문자이자 예술의 동반자로서 네 사람은 공사 기간 동안 함께 머물며 작품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건축에 앞선 정원: 르 노트르의 조경 혁명
당시 많은 저택이 그러했듯, 보르비콩트에서도 건물보다 정원이 먼저 조성되었습니다. 푸케는 농장, 화단, 채소밭, 과수원을 요청했고, 르 노트르는 남북 축을 기준으로 자수 화단, 잔디 화단, 그리고 동서 횡단 축에 연못과 채소밭을 배치했습니다. 동쪽으로는 자수 화단, 왕관 화단, 물 격자 무늬 정원을 지나 동굴과 폭포에 이르게 했으며, 보 연못(Etang de Vaux)을 매입한 후에는 정원을 남쪽으로 확장해 대운하(Grand Canal)를 굴착했습니다. 성에서 정원 끝 헤라클레스 상까지는 1km가 넘게 이어지며, 동굴 위에 선 헤라클레스 상이 남북 축의 시각적 종점을 이룹니다. 이는 르 노트르가 훗날 베르사유에서 완성할 '거대한 원근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운명의 밤, 166년 8월 17일의 축제
보르비콩트는 왕국의 가장 화려한 축제가 열리는 무대였으며, 그 기록은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과 마들렌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éry)의 글에 남아 있습니다. 1661년 8월, 루이 14세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축제는 절정이었습니다. 1655년경 푸케의 가신으로 들어온 바텔(Vatel)이 총괄한 이 행사에서는 모든 음식이 동시에 제공되는 '앙비귀(ambigu)'라는 새로운 형태의 차가운 만찬이 베풀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뷔페의 시초로 꼽힙니다. 수문 근처에서는 연극 공연이, 대운하 위로는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함은 왕의 질투와 의심을 샀고, 푸케는 횡령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성은 1673년 푸케의 미망인에게 반환될 때까지 봉인되었고, 그 사이 수많은 조각상이 베르사유로 옮겨졌으며, 1661년 시작된 베르사유 확장 공사에는 보르비콩트를 만든 세 거장이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빌라르 공작에서 쇼아젤-프라슬랭 가문으로
푸케 몰락 후 영지는 긴 잠에 들었습니다. 미망인이 멜룬과 보르비콩트 영지를 매각하자, 1705년경 공작 작위를 받은 빌라르 원수(Marshal de Villars)가 매입해 '보-빌라르(Vaux-Villars)'로 개명하고 현관 삼각벽의 문장을 바꿔 달았습니다. 1714년 그의 아내 잔 앙젤리크(Jeanne Angélique)는 이곳에서 당대 지성인과 귀족이 모이는 살롱을 열었습니다. 빌라르 부부 사후(그는 1734년, 아내는 1763년 사망) 아들인 빌라르 공작이 물려받았으나 빚에 시달려 1년 만에 루이 15세의 수상이었던 쇼아젤 공작(Duc de Choiseul)의 사촌인 쇼아젤-프라슬랭 가문(Choiseul-Praslin)에 매각했습니다. 문장은 다시 교체되었고, 1층의 넓은 방들은 작은 아파트들로 나뉘었습니다.

혁명과 방치, 그리고 경매
1791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프라슬랭 가문이 이주하지 않아 영지는 온전히 보존되었습니다. 1841년 6대 공작이 지붕과 돔의 등불을 수리했으나, 1847년 가문의 비극적 사건 이후 30년간 방치되었습니다. 공사가 중단되고 창문과 블라인드가 부서지며 폐허가 되었고, 결국 가문은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해 경매에 부쳐야 했습니다. 1875년 6월, 성·공원·부속 건물과 농장, 140헥타르 농장, 200헥타르 농장 등 세 개 묶음으로 나뉘어 매각되었습니다.
조머(Sommer) 가문의 위대한 복원
영지가 흩어지거나 헐값에 팔릴 것을 우려한 지역 행정장관은 친구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알프레드 조머(Alfred Sommer)에게 매입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227만 5,400 금 프랑에 영지 전체를 낙찰받았고, 복원에만 500만 금 프랑 이상을 쏟아부었습니다. 조머 일가는 1877년 7월 처음 머물기 시작해 1940년까지 매년 여름과 가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황무지가 된 정원은 푸케 시대의 설계도가 남아 있어 기적적으로 복원 가능했습니다. 폭포, 동굴, 물 격자 무늬 정원, 그리고 남북 축 동굴 위의 헤라클레스 상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아들 에드메(Edme)는 성 안을 꾸미는 데 힘썼고, 푸케의 초상화를 구입하는 등 컬렉션을 늘렸으며, 테두리 화단(parterre des bordersies)을 정비하면서도 영지의 재정 건전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에드메가 운전병으로 징집된 사이, 아내는 부속 건물에 야전병원을 차려 1,115명의 부상자를 치료했습니다. 그녀는 클레망소(Clemenceau)와 포슈(Foch) 원수로부터 감사를 받았고, 1918년 전쟁공로십자훈장(Croix de Guerre)을 수여받았습니다.
보그(De Vogüé) 가문: 대중에게 열린 성으로

1945년 에드메 사후 영지는 네 명의 조카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미망인이 종신 향유권을 가지며 장 드 보그(Jean de Vogüé)가 실질적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기 위해 보그 가문은 정원을 유료 개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지는 곧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념물 중 하나로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등 각국 정상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1968년 아들 파트리스(Patrice)가 경영을 맡으며 적자 해소를 위해 성 내부 투어를 시작하고, 지하 주방을 공개했으며, 마구간엔 고전 자동차 박물관을 조성했습니다. 영화·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적극 활용되어, 2000년경까지 약 50편의 작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베르사유를 배경으로 해도, 촬영은 보르비콩트에서 이뤄질 정도로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현재: 전통의 계승과 미래를 향한 도전
1990년부터 여름철 '촛불의 밤' 행사(2,000개의 촛불과 불꽃놀이)를 시작했고, 2005년부터는 매년 '그랑 시에클(Grand Siècle)' 축제를 열어 잔디 위 오찬, 매사냥 시연, 의상 퍼레이드 등 프랑스식 삶의 예술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세 아들이 남동쪽 날개에서 살다 대중 개방 후 파빌리온(그랑 코뮌 남쪽 날개)으로 거처를 옮기며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계승하고 적자를 줄이며 관람객을 늘리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2013년 이미 30만 5천 명 이상의 방문객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방문객의 시선으로: 성 안으로
이제 관람객의 발걸음을 따라 이 웅장한 영지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정문과 기념비적인 철문을 지나 전정(前庭)을 가로질러 페롱(perron)의 20개 계단을 오르면, 현관 홀과 타원형 살롱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프랑스 건축가의 걸작이자 푸케의 권위와 영광을 찬양하는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1층의 의식용 아파트를 지나면, 루이 14세 시대의 왕실 전실이었던 현재 도서관이 나오는데, 프랑스식과 이탈리아식이 조화를 이룬 숭고한 천장화와 장식으로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중 하나로 꼽힙니다. 마지막으로 타원형 살롱에서 정원으로 나서면, 르 노트르가 설계한 기하학적 낙원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17세기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더 알아보기
- 보르비콩트 성, 장마리 페루즈 드 몽클로(Jean-Marie Pérouse de Montclos), Scala, 2016.
- 보르비콩트에서의 하루, 보그 형제(Les frères de Vogüé), 플라마리옹(Flammarion),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