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20구에 자리한 페르 라셰즈 묘지(Père-Lachaise Cemetery)는 수많은 유명 인사의 무덤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곳입니다. 이 이름은 1626년 예수회가 매입해 '몽루이(Mont-Louis)'로 명명한 부지에서 유래했으며,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였던 프랑수아 다익 드 라 셰즈(François d'Aix de la Chaize) 신부가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파리 증권거래소를 설계한 건축가 알렉상드르 테오도르 브롱니아르(Alexandre Théodore Brongniart)는 1807년 이곳을 굽이진 산책로가 어우러진 숲속 공원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오늘날 페르 라셰즈는 도심 속 최대 규모의 녹지 공간 중 하나로서, 방문객에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위인들의 안식처이자 피로 물든 역사의 현장
파리에서 유명 인사를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요? 생제르망데프레의 문학가들? 기발한 마레 지구? 아니면 에투알 광장 근처의 우아한 살롱? 정답은 의외로 수도 파리 20구의 서민 지역에 있는 페르 라셰즈 묘지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파리의 모든 이들이 이곳에 모이고 잠들었으며, 연간 무려 200만 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습니다. 쇼팽(1810~1849),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 콜레트(1873~1954), 짐 모리슨(1943~1971) 등의 최후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것은 즐거움이자 추모의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벌어졌던 비극들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1814년, 러시아군의 진격 앞에서 폴리테크닉과 알포르 군사학교 학생들이 이 묘지로 피신했다가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죽음의 정원' 한복판에서 젊은 생명들이 흙에 내리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동부 묘지(옛 이름)가 가장 처참하게 기억되는 순간은 단연 1871년 파리 코뮌 사태 때였습니다. '피의 일주일(Bloody Week)' 막바지, 베르사유 정부군과 코뮌 방위대(페데레) 간의 마지막 전투가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포로로 잡힌 148명의 방위대원들은 베르사유군에 의해 총살되었고, 그들이 등을 대고 세워진 벽은 오늘날 '페데레의 벽(Mur des Fédérés)'이라 불립니다. 이후 이곳은 코뮌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정파들에게 기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음침한 묘지에서 가장 영예로운 안식처로
파리 최대의 묘지가 되기 전, 이 땅은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 라 셰즈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 소유였습니다. 당시 파리 시내 묘지의 위생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새로운 네크로폴리스(대규모 묘지) 조성이 결정되었고, 동부 묘지는 1804년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묘지 사용권 가격이 비싸 파리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매장의 80%가 합장묘로 이루어질 정도였습니다. 이에 운영 측은 과감한 홍보 전략을 펼쳤습니다. 바로 몰리에르(1622~1673)와 라퐁텐(1621~1695)의 유해를 옮겨온 것이 시작이었고, 여기에 중세의 전설적인 연인 엘루아즈와 아벨라르의 무덤까지 들여왔습니다. 감각적인 신학자였던 아벨라르는 아름다운 엘루아즈를 사랑한 죄로 거세당했고, 두 사람은 죽음으로 이별했다가… 영원히 재회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잠들게 되었습니다.
낭만주의가 만개하던 시대, 이 화려한 홍보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시민들이 몰려와 추모를 시작했고, 이윽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최후를 이 문필가들 곁에서 보내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아, 인간의 허영심이란… 1830년에는 이미 3만 개의 무덤이 세워졌고, 현재 묘지는 44헥타르 면적에 6만 9천 개의 무덤을 품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이곳은 당대의 '인명사전(Who's Who)' 같은 모습을 띠게 됩니다. 정치인들도 이곳에 잠들었습니다. 펠릭스 포르(1841~1899), 오스만 남작(1809~1891) 등이 그 예입니다. 집회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 이들의 장례식은 종종 은근한 정치적 세력 과시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장례 예술의 걸작들
19세기에 들어서며 '죽음 앞의 평등'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개념이 되었습니다. 일부의 노골적인 허영심이 더해지면서, 묘지는 청동·대리석·연철로 만든 절묘한 조각상과 비석들로 치장되었습니다(1900년 이전의 모든 묘비는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나르키소스들은 자신의 자아에 어울리는 영원한 저택을 짓기 위해 터무니없는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네 가지 물건을 담은, 약 20미터 높이의 기괴한 기둥입니다(주인의 이름은 이미 잊혔습니다). 저기는 야생 사자를 타고 정복자의 기상을 드러내는 조각상이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청동상이 주먹을 불끈 쥔 채 하늘을 향해, 자신을 불멸로 만들지 않은 하느님을 원망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부왕정기, 7월 왕정, 제2제국에 이르기까지 당대 귀족 사회의 모든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며, 담쟁이에 반쯤 덮인 가문의 긍지인 묘비 정면에는 여전히 작위를 드러내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고드 문과 예배당, 바르톨로메의 전몰자 기념비, 엘루아즈와 아벨라르, 몰리에르와 라퐁텐, 들릴, 용(Dragon), 페데레의 벽, 카르텔리에, 오스카 와일드, 조르주 게 예배당 등 12건이 역사 기념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산책을 위한 장소, 페르 라셰즈
5천3백 그루의 나무(그중 일부는 수령 150년)와 야생 풀이 우거진 이 골목길을 거닐면, 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이곳은 과격함을 허용하지 않아 아이들조차 조용해집니다) 마치 손끝으로 역사를 직접 만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듭니다. 일부 무덤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허영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날씨가 흐린 날, 배회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우리 앞을 가로지르면, 프랑스 최초의 화장터 앞에서 갑자기 미심쩍은 마음에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게 됩니다. 다른 길로 돌아서다 고개를 돌리면, 호화로움 속에만 살았던 배우 사라 베르나르(1844~1923)의 마지막 무대와 마주칩니다. 그녀의 무덤은 놀랄 만큼 소박합니다. 깊은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암살된 언론인 빅토르 누아르(1848~1870)의 반상(半像)이 누워 있습니다. 돌출된 하체 부분은 윤이 날 만큼 반짝이는데, 이곳을 만지면 다산이나 남성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이한 이교도 전설 때문입니다. 마음껏 웃어넘기세요. 설레는 멜랑콜리를 벗 삼아 이 아름다운 정원을 자유롭게 거닐어 보세요. 저 미로 같은 길목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죽음의 장소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삶과 역사가 숨 쉬는 이곳에서 말입니다.
- 프레데릭 렐구알슈(Frédéric L'Helgoualch)는 '에디션 드 라 넷(ed. from the Net)'에서 『데시델라(Deci-Delà,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으므로)』를 펴낸 저자다.
더 읽을거리
- 조제 드 발베르데(José de Valverde), 『페르 라셰즈 묘지(The Père-Lachaise Cemetery)』, 우에스트프랑스 출판사(Ouest-France), 2017
- 크리스티앙 샤를레(Christian Charlet), 『페르 라셰즈: 산 자와 죽은 자의 파리 한복판에서(Père-Lachaise : In the heart of the Paris of the living and the dead)』, 갈리마르(Gallimard),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