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33년, 누만티아(Numancia)의 함락은 고대 이베리아 반도 역사의 비극적 상징으로 남아 있다. 로마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는 누만티아 지도자 레토게네스(Retogenes)가 동족끼리 결투를 시키고 패자의 목을 베어 불타는 집에 던지게 했다고 기록했다. 이 잔혹한 묘사는 켈티베리아인을 '목 베는 야만인'으로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사학계의 '잘린 머리 의식' 이론과 타라세나의 해석
1943년, 고고학자 블라스 타라세나(Blas Taracena)는 켈트 이베리아의 전리품 머리들(Trophy-heads in Celtic Spai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누만티아 발굴 중 4호실 지하 바닥에서 발견된 네 개의 인골 두개골을 두고, 이것이 갈리아인의 전형적인 전사 의식인 '목 베기 의식(rite celtique des têtes coupées)'의 증거라고 단언했다. 이 해석은 켈티베리아인을 중부 유럽 켈트족과 동일시하려는 당시 프랑코 정권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스페인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고전 문헌이 그린 '야만인'의 초상
목 베기 관습의 유명세는 고대 문헌에서 비롯된다. 디오도로스(Diodorus)와 스트라본(Strabo)은 포시도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해 갈리아인들이 적의 목을 말에 매달거나 신전에 못 박고, 향유로 방부 처리해 집안에 보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극히 드물다.
- 디오도로스는 카르타고의 셀리눈테(Selinunte) 약탈(기원전 409년)에서 '야만인들'이 목을 베었다고 썼으나, 이들이 이베리아 용병인지 켈티베리아인인지는 불확실하다.
- 스트라본은 루시타니아인이 포로의 오른손을 잘라 제물로 바쳤다고 했고, 아우렐리우스 빅토르(Aurelius Victor)는 누만티아 아버지가 딸의 혼인 조건으로 적의 오른손을 요구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이 기록들은 '문명인(그리스·로마) 대 야만인'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 속에서, 신체 훼손을 야만성의 증거로 삼아 로마의 정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따라서 사료 비판적 독해가 필수적이다.
고고학이 말하는 것: 전리품 머리 vs 의식적 매장
프랑스 남부 로크페르튀즈(Roquepertuse)와 앙트르몽(Entremont)의 갈리아 성소에서는 수십 개의 두개골을 진열한 석조 니치가 발견되어 '전리품 머리 의식'을 뒷받침했다.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 이베리아 문화권(푸이그 카스테야르, 울라스트레트 등)에서도 성벽과 공공건물에 무기·두개골을 박아 넣은 흔적이 확인된다.
그러나 타라세나가 주목한 내륙 메세타 지방(켈티베리아 핵심 지역)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 누만티아, 우사마(Uxama), 페냐 델 사코(Peña del Saco)에서 구멍 뚫고 다듬어진 두개골·대퇴골 조각이 출토됐으나, 층위가 교란돼 기능과 맥락이 불분명하다.
- 반면, 베론족 카스트로 라 오야(La Hoya)의 주요 건물 바닥 아래 인골 두정골과 토기 2점이 함께 묻힌 소형 매장, 베톤족 네크로폴리스 라 오세라(La Osera) 초기층(기원전 4세기)의 두개골·석재·용기 부장, 세로 도 카스텔로(Cerro do Castelo, 기원전 3세기)의 거대 제의 퇴적물 중앙에서 발견된 참수된 여성 두개골 석관, 아스투리아스 카스트로 차오 사마르틴(Chao Samartín)과 노에가(Noega) 성벽 기초부의 여성 두개골편 석관 등은 '전리품 전시'가 아닌 '건물·방어시설·묘역의 봉헌·성화 의식'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내륙 켈트 이베리아에는 전사적 전리품 머리 전시의 제도적 흔적이 없고, 대신 은밀한 의례적 매장만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도상학: 잘린 머리인가, 신성한 머리인가?
켈트 미술의 전형적 모티프인 '켈트의 머리/가면'과 동전·부조의 참수 장면은 갈리아에서 풍부하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하밀카르(팔시온) 장식이나 산트 마르티 사로카(Sant Martí Sarroca) 조각 등 참수 가능성이 있는 도상이 보인다.
내륙 켈티베리아에서는 지휘봉(signa equitum)과 '기마상' 피불라(기원전 3~1세기) 말 주둥이 아래 사람 머리가 조각된 경우가 여럿 있는데, 이것이 전리품 머리 전시 재현인지, 아니면 조상신·수호신 상징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우사마 출토 장례용 항아리의 날개 달린 칸에 사람 머리와 새가 번갈아 새겨진 프리즈는 사후 영혼의 여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읽힌다.
대서양 연안과 서부 메세타의 석조 머리상(cabezas cortadas) 다수는 원위치에서 출토되지 않았으나, 아 그라냐(A Graña)와 산 세브리안 데 라스(San Cebrián de Las) 카스트로 입구에서 발견된 두 점은 경계 표지·수호신 기능으로 해석된다. 다두(多頭)·뿔 달린 머리상이 많은 점도 이들이 초자연적 존재임을 시사한다.
비스페사(La Vispesa)와 엘 팔라오(El Palao) 비석(기원전 2~1세기)의 전사상 곁에 홀로 새겨진 오른손, 수많은 등잔·장신구·환대 테세라(tesserae)의 머리·손 형상 역시 '잘린 신체 부위'가 아니라 권위·맹약·수호의 상징일 가능성이 크다.
고정관념의 무게를 넘어
1943년 이후 켈티베리아 '목 베기 의식' 논의는 의심스러운 문헌을 확증으로, 기능 불명의 두개골을 전리품으로, 모든 얼굴 도상을 참수로 자동 치환해 왔다. 이는 '고대 히스파니아인의 중부 유럽 기원'이라는 원하는 민족적 연결고리를 증명하기 위해 갈리아의 문화 형질을 기계적으로 이식한 결과다.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 현실은 더 복잡하다. 고대 사회(켈트 사회 포함)에서 머리는 생명의 정수가 깃든 신성한 부위로 여겨졌고, 참수는 입문 의식·제사·형벌·정치 선전·전쟁 전략 등 다양한 맥락에서 행해졌다. 머리 도상 역시 다의적이다. '켈트족이니까 목 베기 의식'이라는 클리셰는 이 풍부한 상징 세계를 단일 코드로 환원시키는 오류다.
그렇다고 켈티베리아인이 목을 베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참수는 보편적 현상이므로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하지만 그것이 켈티베리아를 특징짓는 보편적·제도적 '전사적 목 베기 의식'이었음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는 현재 없다. 주제는 여전히 열려 있으며, 미래의 발굴과 해석을 기다린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실체는 낡은 고정관념보다 훨씬 다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