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다네비르크(Danevirke): 철기 시대부터 1864년까지 덴마크를 지킨 30km 거대 방어 요새의 역사

스칸디나비아의 철기 시대는 지중해 연안이나 근동 지역과는 연대 기준이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철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되어, 바이킹 시대가 열리는 서기 800년경까지 이어졌습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서기 500년 이전 북유럽 철기 시대에 스웨덴 남부와 오늘날 유틀란트 반도·덴마크 제도 일대에 거주하던 게르만 부족 '다노스(Danos)'가 대규모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것은 반도에서 가장 좁은 구간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로지르는 거대한 방어선이었습니다.

다네비르크(Danevirke): 철기 시대부터 1864년까지 덴마크를 지킨 30km 거대 방어 요새의 역사

이후 바이킹들은 이 방어선을 확장해 전략적 이점을 누렸고, 요새는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군사 목적으로 활용된 것은 1864년 공작 전쟁 때였습니다. 이 요새 시스템의 이름은 다네비르크(Danevirke), 문자 그대로 '데인족(덴마크인)의 축조물'을 의미합니다.

다네비르크는 발트해 연안의 무역항 헤데비(Hedeby)에서 유틀란트 반도 서해안의 넓은 만인 슐라이(Schlei) 장벽까지 약 3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여러 개의 벽과 참호, 언덕(mound)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벽의 높이는 지역에 따라 3.6미터에서 6미터에 이릅니다.

다네비르크(Danevirke): 철기 시대부터 1864년까지 덴마크를 지킨 30km 거대 방어 요새의 역사

1970년대에 진행된 발굴 조사와 2013년의 추가 분석 결과에 따르면, 다네비르크의 건설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서기 500년 이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나머지 두 단계는 서기 737년과 968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구조물의 기원이 본래 방어 목적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서기 500년 이전 어느 시점에 방어벽으로 전환된 일련의 인공 항해 수로였다는 가설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808년, 덴마크의 고드프리 1세(Godfred I)는 남쪽 프랑크족 이웃의 침입을 우려하여 요새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또한 덴마크 국가 전설에 따르면, 936년부터 958년까지 통치한 고름 왕(Gorm the Elder)의 왕비 티라(Thyra) 여왕도 건설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는 고고학적 분석 결과와도 부합합니다.

12세기에는 발데마르 1세(King Valdemar I)가 이곳을 발트해 군사 작전의 기지로 삼으면서 방어벽을 보강하고 석벽을 추가했습니다. 이렇게 재정비된 구조물 중 일부는 오늘날 발데마르스무렌(Valdemarsmuren), 즉 '발데마르의 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네비르크는 수 세기에 걸쳐 덴마크 남부 국경에서 프랑크족과 여타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848년 덴마크와 독일 연방이 충돌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에는 참호와 포병 진지로 보강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네비르크는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는 덴마크 국민 단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네비르크(Danevirke): 철기 시대부터 1864년까지 덴마크를 지킨 30km 거대 방어 요새의 역사

그러나 1864년 공작 전쟁, 즉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상황은 달랐습니다. 처음에 덴마크군은 다네비르크를 독일 영토 내 전투를 벌이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했지만, 덴마크 최고 사령부가 코펜하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디볼(Dybbøl)의 참호로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프로이센군은 저항 없이 다네비르크를 통과해 전진했습니다. 결국 이곳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난공불락이라 믿어온 방어선은 현대전의 화력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덴마크 여론에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로 다네비르크 전체는 독일 영토 안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이 이미 현실이 된 상황에서 연합군의 제2차 침공을 우려하여 이 일대를 대전차 참호로 개조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덴마크 고고학자 쇠렌 텔링(Søren Telling)이 '아리아 문명의 중요한 잔재를 파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하인리히 히믈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