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채로네아의 사자상: 테베 신성대대의 몰락을 기린 기원전 318년의 기념물, 1818년 영국 여행자들의 재발견

보이오티아 중앙에 있던 거대한 호수 코파이스호(19세기에 완전히 말라붙은 호수) 기슭에 자리한 도시 채로네아는 이미 고대부터 수많은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한 전투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는 단연 기원전 338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이끄는 군대와 테베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 연합군이 맞붙은 바로 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는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서는 미래를 결정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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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대의 최후

이 전투에서 가장 인상 깊고 오래도록 회자된 사건 중 하나는 당시 그리스 최강의 정예 부대로 여겨지던 테베의 '신성대대'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점입니다.

신성대대는 남성 연인 150쌍, 즉 300명으로 구성된 부대로, 에파메이논다스의 동료이자 동시대의 테베 장군이었던 고르기다스가 창설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과 스파르타를 최종적으로 무찌른 활약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신성대대에서 각 커플은 성인 남성(헤니오코이, Heniochoi)과 젊은 청년(파라이바타이, paraibatai)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약 33년에 가까운 부대 역사 전체를 통틀어 채로네아는 유일한 패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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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와 끝까지 버틴 300인

젊은 시절 테베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보이오티아인들의 군사 전술을 익혔던 필리포스는 테베·아테네 연합군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신성대대만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고, 포위된 채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은 채 온전히 전멸했습니다. 채로네아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플루타르코스는,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 필리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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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날 신성대대 소속 300명 전원이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루어진 채로네아 공동묘지 발굴 조사에서는 254구의 해골만 확인되었습니다.

이 공동묘지는 파우사니아스가 저술한 『그리스 안내기』에서도 언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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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상의 건립과 잊힌 세월

실제로 패전 후 필리포스는 테베인들이 전사자를 매장하도록 허락했고, 그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약 20년 뒤 높이 약 6미터에 달하는 사자 조각상이 세워졌습니다. 다만 플루타르코스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춘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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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우연한 재발견

그러던 중 고고학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우연의 하나가 찾아옵니다. 1818년 6월 3일, 건축가 조지 러드웰 테일러가 에드워드 크레시, 존 샌더스, 화가 윌리엄 퍼서와 함께 채로네아로 소풍을 떠난 일행은 몇몇 조각 파편을 발견했고, 곧바로 그것이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한 바로 그 사자상의 일부일 것이라 의심했습니다. 테일러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채로네아의 사자상: 테베 신성대대의 몰락을 기린 기원전 318년의 기념물, 1818년 영국 여행자들의 재발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동행자 중 한 명의 일기에서 발췌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파편들은 곧 다시 발굴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테일러와 일행은 유물을 대영박물관으로 옮기려 시도하기도 했으며, 1820년에는 울프(Wolfe) 건축가 등 새로운 전문가들이 조사에 나서 기념물의 올바른 복원안을 제안했습니다. 1879년부터 이어진 발굴 조사에서는 사자상이 원래 페리볼로스(peribolos), 즉 사각형 담장 구역의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사자상의 원래 받침대도 발견되었습니다.

채로네아의 사자상: 테베 신성대대의 몰락을 기린 기원전 318년의 기념물, 1818년 영국 여행자들의 재발견

또한 이 기념물은 수 세기에 걸쳐 점차 땅속으로 가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테일러 일행이 발견한 지 몇 년 뒤에 일어난 그리스 독립전쟁 중에 산산조각 난 채 그 자리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집단 무덤의 발굴

하지만 인골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년 뒤인 1880년이 되어서야였습니다. 고고학자 L. 피탈리스가 더 깊은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인골이 드러났고, 유물 관리관(에포로스) P. 스타마타키스가 직접 집단 무덤 전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뼈가 담긴 여섯 상자가 아테네로 옮겨졌습니다. 254구의 해골 외에도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화장(火葬)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은 나중에 매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1902년, 원래 자리로 돌아가다

한편 사자상 복원을 두고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수많은 후원 제안이 이어졌지만, 그리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마침내 1902년, 사자상은 발견된 바로 그 자리, 즉 신성대대 테베 전사자들의 무덤 위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복원 사업은 100년 넘게 신성대대의 정신을 기려온 단체 '채로네아 협회(Order of Chaeronea)'가 비용을 부담했으며, 조각가 라자로 소호스가 작업을 맡아 고대 파편들을 강철 골격 위에 조립하고 빠진 부분을 메워 완성했습니다.

채로네아의 사자상: 테베 신성대대의 몰락을 기린 기원전 318년의 기념물, 1818년 영국 여행자들의 재발견

완성된 사자상은 현대 도로 남쪽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세워져 근처의 마케도니아군 고분을 바라보고 있으며, 주위를 키프러스나무가 감싸고 있습니다. 사자의 표정은 진지하고 거의 슬픔마저 어린 듯하지만, 동시에 긍지에 차 있습니다. 어쩌면 전사한 이들을 향한 애도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사자상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의미

하지만 이 사자상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테르모필레에는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300명 스파르타 전사들이 쓰러진 자리를 표시하는 사자상이 먼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신성대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300명의 테베 병사들이 크세르크세스를 위해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려는 동맹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전해에 테베는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에 항복한 바 있었죠. 채로네아의 사자상은 두 사건을 나란히 놓고 비교함으로써, 페르시아 편에 서서 싸웠다는 테베의 수치를 씻어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