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문헌 전통에 따르면, 훗날 부처님이 되는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버지 숙도다나 왕과 어머니 마야 왕비의 궁전에서 29세까지 생활했습니다. 이 궁전이 자리한 곳은 사키아(석가) 일족의 수도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였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34년경 궁전과 도시를 떠났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암살되고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권력을 잡았으며, 아테네에서는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최초의 비극 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카필라바스투는 코살라 왕 비루다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이곳은 천 년 가까이 불교 순례의 중심지로 번영하며 아시아 각지의 순례자들을 맞이했습니다. 서기 5~7세기에는 중국의 고승 법현(Faxian)과 현장(Xuanzang)이 이곳을 방문해 각각 상세한 여행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들은 오늘날 유적지 위치를 추정하는 핵심 단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인도와 네팔 지역에서 불교의 흔적이 옅어지면서, 19세기에 이르러 카필라바스투의 정확한 위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전환점은 1896년 찾아왔습니다. 당시 지역 총독이었던 독일 출신 고고학자 알로이스 안톤 퓌러(Alois Anton Führer)가 부처님의 탄생지를 표시하는 아쇼카 황제의 석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약 6m의 기둥은 네팔 남부의 마을 룸비니(Lumbini)에서 발견되었습니다.

2년 후, P.C. 무케르지(Mukherjee)가 발굴 작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룸비니 석주 발견지 인근의 틸라우라콧(Tilaurakot)에서 도시 유적을 조사했고, 법현과 현장의 여행 기록과 교차 검증하여 이곳이 바로 고대 카필라바스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발굴 결과 여러 궁전 건물, 사원, 석조 기념물, 조각품, 연못 등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비된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발견된 유물 다수는 현재 근처의 카필라바스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1970년대 네팔은 이 일대 지역의 이름을 카필라바스투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1967년, 일본 고고학자들이 틸라우라콧에서 기원전 5세기로 추정되는 유물과 채색 회색 토기를 발굴하며 연대의 신빙성을 높였지만, 2001년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 연구팀은 현장의 유구가 실제로는 부처님 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도 측의 주장, 즉 진짜 카필라바스투는 틸라우라콧에서 약 25km 떨어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피프라와(Piprahwa)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최근 수십 년간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틸라우라콧에서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는 유물들이 잇달아 확인되면서, 다시 틸라우라콧 설에 무게가 실리는 추세입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두 유적지가 과거 하나의 거대한 정착지였으며, 분리는 비교적 최근인 수백 년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궁전이 있던 진짜 장소를 둘러싼 고고학적 미스터리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