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메시지, 하드리아 성벽에서 되살아나다

2017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발굴된 새로운 나무 판 문서들은 로마 제국 변경(limes) 지역에서 복무하던 로마 병사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최근 해독 작업을 마치고 공개되었습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메시지, 하드리아 성벽에서 되살아나다

빈돌란다(Vindolanda)에서 발견된, 마스쿨루스(Masclus)가 율리우스 베레쿤두스(Julius Verecundus)에게 보낸 편지

학술지 《브리타니아(Britannia)》가 이번에 공개한 것은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머지않은 현재의 노섬벌랜드에 위치한 고대 로마 요새의 진흙 땅에서 발견된, 잉크로 글씨가 쓰인 네 장의 나무 판입니다. 이 문서들은 당시 빈돌란다 요새의 지휘관(프라이펙투스)이었던 율리우스 베레쿤두스의 이름으로 남겨진, 무려 2000년 된 기록들입니다. 빈돌란다는 서기 12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명으로 건설된 117km 길이의 장성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방어 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2017년에는 영국 고고학자들이 학계에서 '빈돌란다 문서(Tabulae vindolandenses)'라 불리는 24점의 나무 판과 서체 조각들을 발굴한 과정이 소개된 바 있으며, 그 정교한 해독 작업이 약 19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완료되었습니다.

빈돌란다 재단(Vindolanda Trust)의 총괄 디렉터 앤드루 버클리(Andrew Birley)는 "율리우스 베레쿤두스와 주고받은 서신은 로마 제국 최북단에 주둔한 고위 장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료"라고 설명했습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메시지, 하드리아 성벽에서 되살아나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경에 위치한 로마 요새 빈돌란다의 항공 사진 © Vindolanda Trust

화려한 대발표는 아니지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감동적인 기록들입니다.

노예에게 보낸 쪽지와 복무 경감 요청

벨기카 갈리아의 옛 부족인 통그리족(Tongri) 제1코호르트의 지휘관이었던 율리우스 베레쿤두스는 기병 부대를 이끌었는데, 첫 번째 쪽지에서 자신의 노예 아우닥스(Audax)에게 안부를 전한 뒤, 신선한 야채 한 짐의 운송에 문제가 없었는지, 그리고 잘못 보내진 열쇠 이야기를 묻고 있습니다. 받은 열쇠는 '작은 창고'에 배정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서신은 안당기우스(Andangius, 라인란트에서 확인된 게르만계 이름)라는 인물이 베레쿤두스에게 보낸 것으로, '측량사 크리스푸스(Crispus)'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복무를 덜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병역 기간은 무려 25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의 부탁이라고 표현된 만큼, 과중한 노역에서 잠시 벗어나 달라는 청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맥주와 식물 꺾꽂이!

세 번째 편지는 데쿠리온(decirio, 기병 분대장) 마스쿨루스와 관련된 것으로, 그의 서신 교환은 이미 앞서 공개된 목판들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성벽 초소의 병사들에게 맥주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인물이 바로 그였습니다. 연구자들은 "마스쿨루스와 율리우스 베레쿤두스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빈돌란다) 근처에 주둔하며 기병 분견대(vexillatio)를 지휘하고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마스쿨루스는 '다섯 명'의 휴가를 허락해 줄 것을 권하는 듯합니다. 이들은 통그리족도 바타비족도 아닌, 라에티아(오늘날 스위스) 출신 두 명과 보콘티아(갈리아 남부 부족) 출신 세 명이었습니다. 또한 탈렘푸스(Talempus)라는 사람에게서 칼을 회수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식물 꺾꽂이를 보냈다는 내용도 덧붙여 있습니다. 갈리아 북부 변방에서 원예를 즐기던 로마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네 번째 목판은 여러 단어가 판독 불가능해져 읽기 어렵지만,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Caecilius Secundus)가 요새 사령관 베레쿤두스에게 알린 민원으로 보입니다. 내용은 데쿠미누스(Decuminus)라는 남자의 '작은 분노 폭발'에 관한 것으로,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으나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1세기 로마 제국 북부 변경에 배치된 로마군의 다문화적 구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서로 다른 부족 출신 병사들 사이의 갈등을 풀고 부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조정이 필요했음도 시사합니다.

로마 군단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로마 군단(레기오)은 공격전 시 5,000~6,000명, 평시에는 4,0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군단은 10개 코호르트로 나뉘었고, 각 코호르트는 3개 마니풀루스와 6개 켄투리아(백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켄투리오(백인대장)의 지휘를 받는 기병 132명이 있었으며, 갈리에누스 황제 시대(259~268년)에는 72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군단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 사망 시점(서기 14년)에는 23~25개 군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보조 부대 제외 약 15만 명). 실제로 각 군단은 숫자와 별칭으로 명명되었으며, 레기오 III 아우구스타(Legio III Augusta)처럼 보조 부대를 동반했습니다. 보조 부대 병사들은 다양한 부족 출신에서 선발되었습니다. 갈리아인과 스페인인은 기병으로, 브리튼인은 정찰병으로, 트라키아인과 시리아인은 궁술로 명성이 높았고, 게르만인은 "그들의 잔혹함으로 적을 겁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보조 부대는 500명 또는 1,000명 규모의 코호르트로 편성되어 프라이펙투스의 지휘 아래 놓였는데, 빈돌란다 요새와 율리우스 베레쿤두스에게 맡겨진 부대도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제정 시대 내내 국경군은 총 25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출처: 얀 르 보헥(Yann le Bohec), 파리 소르본느대학교 명예교수, 로마 전쟁사 전문가
더 읽기: 『로마의 전쟁(The Roman War)』, 얀 르 보헥, 타이앙디에(Taillandier),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