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생루이 9세의 진짜 사인, 페스트가 아닌 '괴혈병'이었다

페스트가 아니라 괴혈병? 생루이의 죽음을 다시 읽다

1270년 제8차 십자군 원정 도중, 튀니스 성벽 앞에서 프랑스 왕 루이 9세, 이른바 '생루이'를 쓰러뜨린 것은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한 과학자 팀이 실시한 새로운 분석은 이질이나 발진티푸스 같은 기존 추정 병명 대신 전혀 다른 질환을 가리키고 있다.

생루이 9세의 진짜 사인, 페스트가 아닌  괴혈병 이었다

1270년 8월 25일, 제8차 십자군 중 튀니스에서 숨을 거두는 생루이. 장 프로아사르(1337~1400)의 『프랑스 대연대기』에 실린 세밀화. 상티이 콩데 미술관 소장.

'괴혈병'이라는 충격적인 진단

이질도, 발진티푸스도, 그리고 페스트도 아니다. 1297년 시성 이후 '생루이'로 불리는 루이 9세는 실제로 1270년 8월 25일 튀니스 교외에서 괴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재위의 정점에 서 있었고, 동방 라틴 국가들을 구하기 위해 약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8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바로 그때였다. 결국 왕은 끝내 함락하지 못한 튀니스 성벽 아래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법의학자 필립 샤를리에(Philippe Charlier)에 따르면, 이 질병은 "급성 비타민C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며, 중증일 경우 치아가 흔들리고 잇몸에 고름이 차고 출혈이 일어난 뒤 사망에 이르는 병"이다. 베르사유-생캉탱앙이블린 대학교(UVSQ) 연구진과 공동으로 수행한 이번 연구의 결론은 국제 학술지 『Journal of Stomatology, Oral and Maxillofacial Surgery』에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파리 카이브랑리 박물관 연구·교육 부서를 이끌고 있는 샤를리에는 고병리학자이자 이색적인 전문가로, 오랫동안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의 유해—적어도 그 남은 것들—를 분석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된 생루이의 턱뼈(하악골)—이미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에 대한 육안 관찰 연구를 통해 이 치명적인 질환의 흔적을 감지해 낸 것이다. 물론 더 정밀한 분석이 뒤따를 예정이다.

생루이 9세의 진짜 사인, 페스트가 아닌  괴혈병 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왕실 하악골 CT 스캔 영상을, 13세기 제작되어 노르망디 메느빌 교회에 보관된 생루이 상 위에 겹쳐 놓은 모습. 출처: Philippe Charlier et alii

턱뼈를 어떻게 검증했나

"하악골에 대한 직접 검사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루어졌고, 이어 CT 스캔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이 진행됐습니다." 샤를리에는 설명한다. "또한 완전한 해부학적 비교를 위해 하악골의 가상 복제본을 3D로 중첩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당대 군주와 동시대인인] 노르망디 메느빌 교회에 소장된 생루이 석상 위에 말입니다. 여기에 유물에서 발견된 병변을 더 잘 해석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역사·과학 문헌 연구가 보완되었습니다."

장 드 조앵빌이 기록한 '군대병'

결정적 단서는 제7차 십자군(1248~1254) 때 왕을 따랐던 전우이자 전기 작가인 장 드 조앵빌(Jean de Joinville, 1224~1317)의 기록에서 나왔다. 그는 열악한 식사로 병사들을 몰아넣던 '군대병(maladie de l'Ost)'의 파괴적인 영향을 직접 목격했는데, 이 증후군은 괴사성 잇몸염("잇몸이 썩었다")과 다리의 극심한 관절 통증("군대병은 입과 다리에 있다"), 발열, 근육 긴장의 상실("다리 살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다리 피부에는 검고 흙처럼 얼룩진 딱지가 앉았다"), 그리고 코피로 묘사되었다. "이 병에 걸린 우리에게는 살과 잇몸이 썩어 들어왔다… 아무도 피하지 못했다." 이 모든 증상은 괴혈병과 완벽히 부합하며, 노트르담 대성당 하악골에서 발견된 잇몸과 뼈의 병변 흔적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생루이 9세의 진짜 사인, 페스트가 아닌  괴혈병 이었다

루이 9세(생루이)의 것으로 전해지는 턱뼈.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소장. 출처: Philippe Charlier et alii

왕의 유해, 어떻게 노트르담까지 갔나

그렇다면 생루이로 추정되는 이 턱뼈는 어떻게 필립 샤를리에의 손에 들어갔을까? 왕의 것임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 이를 이해하려면 군주의 시신이 프랑스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을 떠올려야 한다. 당시 관례에 따라 유해는 운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현지에서 포도주, 물, 향신료가 섞인 혼합물로 '조리'되었다. 특히 여름철, 귀국에 몇 주가 걸리는 긴 여정에서 시신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리 후 "그의 시신은 살을 분리하기 위해 해부되고 삶겨졌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모스 투토니쿠스(mos Teutonicus)', 즉 시신을 분해하여 각 부분이 서로 다른 매장지로 향하게 하는 관행이다. 성유물 숭배가 절정에 달해 있던 당시, 왕국 곳곳에서 왕의 유해 일부를 안치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생루이 자신도 성유물의 열렬한 신봉자였는데, 그래서 그는 기독교 세계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들여 안치할 무대로 파리에 생트샤펠을 세웠다.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현재는 노트르담 대성당 보물고에 보관)과 수난의 못 하나가 그것이다. 카페 왕조 시대에는 왕이 왕립 묘지 밖에 안장되는 일이 너무 흔해져, 이 관행은 마침내 1299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칙령 'Detestante feritatis'를 통해 규탄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후계자 베네딕토 11세에 의해 다시금 언급되었다.

1270년, 생루이의 유골은 튀니스 포위전 당시 아버지 곁에 있었던 아들 필리프 3세 르 아르디(용맹공)에 의해 프랑스로 옮겨졌다. 유골은 프랑스 왕들의 묘소인 생드니 대성당 왕립 네크로폴리스에 안치되었다. 내장은 남동생 앙주의 샤를이 있는 시칠리아, 팔레르모 근처 몬레알레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보관되었다가 19세기에 일부 베르사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3세기 시성 이후 무덤이 개봉되면서 유골들은 흩어지게 되었다."라고 샤를리에는 적었다. 생드니 대성당의 성골함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져 프랑스 혁명의 파괴를 피해 살아남았고, 덕분에 유해의 계보를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었다.

괴혈병 외에도 있었던 또 다른 병

"이전에 내장 소량 생검 시료에 대해 시행한 기생충 분석에서는 왕이 기생충 질환—요로 주혈흡충증—도 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제7차 십자군(1248~1254) 당시 이집트 다미에타에서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제8차 십자군 참전 당시 이미 건강이 크게 약해져 있던 군주였던 셈이다. 고병리학적 검사에 기반한 이 회고적 진단은, 사망의 유력한 원인이 되었을 만큼 다양한 신체 결핍 상태를 드러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