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 유럽에서 무덤이 다시 열리던 관행은 오랫동안 약탈 행위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유럽 연구진의 최근 연구는 이러한 통념에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 메로빙거 왕조와 카롱거 왕조 시기 알자스 지역의 장례 공간과 매장 관습을 보여주는 삽화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수많은 무덤이 다시 열렸다
서기 5세기에서 8세기 사이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무덤을 다시 여는 일이 매우 흔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흔적을 오랫동안 도굴의 증거로 판단해 왔습니다. 그러나 유럽 연구팀이 이 현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학술지 《안티쿼티(Antiquity)》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절도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구진은 잉글랜드 남부에서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에 이르는 100여 곳의 네크로폴리스(대규모 묘지)를 조사해 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놀랍게도 상당 비율의 무덤이 재개장 대상이었으며, 지역에 따라 편차도 컸습니다. 스톡홀름 대학교 연구원이자 이번 연구의 저자인 아스트리드 노터먼(Astrid Noterman)은 프랑스 과학매체 <사이앙스 에 베니르(Sciences et Avenir)>에 "프랑스에서는 평균 30%의 무덤이 다시 열린 반면, 바이에른에서는 54%, 잉글랜드 켄트주에서는 1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덤의 재개장은 특히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반 사이에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주로 '열묘지(row necropolis)'라 불리는 형태의 묘지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름 그대로 무덤들이 줄지어 배열된 이 유형의 묘지에서 고인들은 나무 관에 안치되었고, 때로는 넓은 석실에 매장되었습니다. 무기, 보석류, 의복 장신구 등이 일반적으로 함께 부장되었는데, 바로 이 물건들이 무덤을 다시 연 사람들의 목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겨진 귀금속, 가져간 것은 '가치 없는' 물건
19세기 고고학자들이 처음 이 무덤들을 발굴했을 때, 뼈와 유물이 어긋나 있고 부서져 있는 등 심각한 무질서 상태를 목격하고 이를 약탈의 결과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 현장의 자료를 새롭게 검토하면서, 연구진은 이러한 행위가 상상했던 것처럼 무질서하고 탐욕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귀중한 유물들이 무덤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컨대 잉글랜드 켄트주의 한 묘지에서는 브로치(옷핀)만 가져갔지만, 은·금 펜던트 6개와 함께 78개의 구슬로 된 목걸이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회수된 물건 상당수는 실용성이나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자주 회수된 유물은 여성의 경우 브로치, 남성의 경우 검이었습니다. 이들 물건이 남긴 산화 흔적은 오랫동안 무덤 속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손상된 물건일수록 회수되곤 했다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는 검의 파편만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약탈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도 있습니다. 노터먼은 "풍부한 부장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풍경 위에서도 잘 드러나는 무덤들은 의도적으로 다시 열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무덤들은 대개 묘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며, 재개장은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매장에만 적용되었습니다.
행위의 주체는 친족, 시신 분해 직후의 개입
재개장은 피장자의 사망과 시기적으로 가까운 시점, 즉 한두 세대 차이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연대기는 시신과 나무 관의 부패 흔적을 통해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점이 완전히 분해된 이후이면서도 나무 관이 썩기 전에 무덤을 다시 열었습니다. 따라서 이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고인의 친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노터먼은 "이러한 재개입이 값비싼 물건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확인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동기는 복합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이러한 행위는 공동체가 특정 문제에 대해 내린 하나의 대응으로 보인다. 제사 의례, 권위 주장의 필요성, 죽은 자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욕구, 혹은 집단 간의 긴장이 그 배경이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무덤의 재개장은 무례한 도굴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던 의식적인 행위였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