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D데이 직후 벌어진 가장 처참했던 전투 중 하나가 바로 '112고지(Côte 112)' 전투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전투의 잔혹함은 물론 당시의 매장 관습까지 드러내는 유물들을 연이어 발굴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근현대사를 고고학적으로 조명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해변 중 하나인 유타 비치(Utah Beach)
"민들레 한 송이가 내 세상의 닻"
"병사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땅바닥을 응시합니다. 눈에는 광기의 빛이 어른거리죠. 그저 자신의 연약한 몸이 피투성이 살덩이로 부서지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나는 머리 곁에 핀 민들레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정신을 붙듭니다. 이 세상 끝에서 저 작은 꽃이 나의 닻이 되기를..."
이 글의 주인공은 1944년 6월 6일 D데이 상륙 직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노르망디 '112고지'에서 싸웠던 병사 한 명입니다.
근현대사도 고고학의 영역으로
프랑스에서는 최근 들어 근대사 시기 역시 고고학의 연구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예방고고학연구소(INRAP) 연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투 현장을 발굴하며 알려지지 않았던 세부 정보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INRAP의 도미니크 코르드(Dominique Corde)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 방대한 기록,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 덕분에 우리는 비극의 시대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고학 발굴은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합니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칼바도스, 망슈, 오른 주에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흔적, 즉 점령기와 상륙작전의 상흔을 조사하고 목록화하는 것입니다."
그는 특히 "전투 중이나 직후에 전사자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했습니다. 전후 대대적인 유해 수습 작업이 진행되긴 했지만, 이는 학술적 감정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때로는 전사자의 유골 일부만 수습되고 끝나기도 했습니다.
'지옥'이었던 112고지 전투
칼바도스주 몰토(Maltot) 일대 유적에서 최근 영국군 병사 3명과 약 250m 떨어진 지점에서 독일군 병사 1명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INRAP 고고학자들은 에스케노트르담(Esquay-Notre-Dame) 인근에서 벌어진 악명 높은 112고지 전투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112고지는 D데이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독일군과 영국·캐나다 연합군이 격돌한 요충지였습니다. 공격과 반격이 거듭되는 동안 인명 손실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도미니크 코르드는 전투의 참상을 이렇게 짐작하게 했습니다. "무장친위대(Waffen SS) 여러 연대가 투입되었고, 그중 하나는 무시무시한 티거 전차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위장하고 매복한 이 전차들이 입힌 피해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은 단 48시간 동안 112고지에 무려 45만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폭탄 구멍, 전차 포탄 흔적, 궤도 자국, 그리고 인골들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112고지에서 발굴된 인골. 사진 출처: Dominique Corde
급조된 무덤에 새겨진 분노
"우리가 발견한 임시 매장지에서는 생존자들의 분노마저 느껴집니다."라고 고고학자는 말합니다. 실제로 서둘러 묻힌 시신 가운데 독일군 병사가 엎드린 채 묻힌 경우가 드물지 않았는데, 이는 마치 최후의 굴욕을 안긴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반대로 독일군이 영국군 병사를 매장하면서 시신 아래 수류탄을 함께 넣어, 훗날 유해를 수습하는 사람들에게 추가 사망자를 내게 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도미니크 코르드는 "이런 사례는 이전에 본 적이 없다"며, 전몰자의 허리띠나 유품을 '추모'라는 이름으로 가져가는 수집가와 금속탐지기 애호가들이 감수하는 위험도 함께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유물 약탈 행위로서 그 경박함과 더불어 법으로 금지된 행위입니다. 그는 "유해에서 탄약이 발견되거나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언제든지 폭발물 처리반에 연락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때로는 양측 병사들의 시신이 급하게 한꺼번에 안치된 집단매장지도 발견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고고학 유적에서 폭발물 처리반이 수거한 탄약. 출처: Dominique Corde/Inrap
열일곱 살 독일군 병사의 유품, 미스터리한 앰플
112고지에서 발견된 약 17세로 추정되는 독일군 병사의 유해에서는 성모 메달과 작은 성물함이 나왔습니다. 종교 물품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동부 전선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에서도 발견되었던 것들입니다. 주머니에서는 영국군 탄피, 담뱃갑에 넣어둔 프랑스 화폐, 콘돔도 발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고학자들은 유리 앰플 12개가 든 상자를 유적의 원래 맥락 그대로 처음으로 회수했습니다. 그중 두 개는 흉곽 부위에서 나왔습니다.

112고지 발굴에서 나온 독일군 병사 유해에서 발견된 앰플 두 개. 출처: Dominique Corde / Inrap
액체 흔적이 확인되자 두 개의 앰플은 파리로 보내져 분석을 받았습니다. 가르슈 대학병원(오드센주)의 약리학자이자 독물학자인 장 클로드 알바레즈(Jean-Claude Alvarez) 박사, 그리고 법의인류학을 전공하는 필리프 샤를리에(Philippe Charlier)가 분석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청산가리(시안화물)가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했던 이 캡슐에는 실제로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혼합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혼합물은 19세기에 고안되었지만 심한 비판을 받아온 성분입니다. 카이 브랑리 박물관 연구·교육 부문을 이끌고 있는 샤를리에는 "몇 방울만 더해도 치료 용량이 치명적 용량으로 바뀝니다. 이 강력한 마취제를 대량으로 복용하면 철저한 독이 됩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112고지의 독일군 병사들에게 이런 앰플이 '필요할 경우 스스로 처리하기 위해', 즉 중상을 입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지급된 것일까요? 도미니크 코르드는 "112고지의 독일군에게는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고 덧붙입니다.
기념 고고학의 가치
"시간적으로 가까워 오해를 받기도 하는 이런 현대 고고학 연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역사 기억의 서술과 현장이 드러내는 실체를 서로 대조할 수 있게 해줍니다. 기념 고고학의 틀 안에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부가 가치입니다." 현재까지도 노르망디에서는 연합군 장병 2000명의 유해가 실종 상태입니다. 112고지에서 발굴된 독일군 병사의 유해는 독일 전몰자 보호협회(Volksbund Deutsche Kriegsgräberfürsorge)에, 영국군 병사 3명의 유해는 영연방전몰위원회(Commonwealth War Graves Commission)에 인도되었습니다.
* 청산가리 가능성이 제기된 이유
종전 무렵 7000명이 넘는 독일군 병사와 다수의 나치 고위 인사들이 청산가리로 자결했다는 점에서 시안화물 존재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 역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면서 청산가리를 함께 삼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두개골 유해를 직접 검시한 필리프 샤를리에는 그의 치아 보철물에서 환원 산화물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청산가리 사용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