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공화국의 정치를 이끈 이정표
감동적인 순간: 1971년 10월 연방의회에서 노벨평화상 축하를 받는 브란트(오른쪽).
기욤 간첩 사건으로 총리 재임 기간이 그늘졌음에도, 빌리 브란트의 정책은 1990년까지 존재했던 구 서독의 기반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1992년 10월 사망하기 2년 전 독일 통일을 목격한 것 역시 그가 총리로서 추진한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의 간접적인 결실이었다.
그의 정치적 위상은 총리 재임 이후에도 정당과 국경을 초월해 인정받는다. 하지만 오랜 정치 여정에서 한자동맹 도시 뤼베크 출신의 그는 당내 동지들과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모욕과 비난을 견뎌야 했다. 당대 많은 정치인, 특히 사회민주당 인사들처럼 그의 삶은 20세기 독일의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유년기와 망명
빌리 브란트는 1913년 12월 18일 뤼베크에서 사민당 가정의 사생아로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지 못했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청소년기에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합류했고, 16세에 사민당(SPD)에 입당했으나 곧 사민당이 타협적이라고 여겨 좌파 분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APD)으로 옮겼다.
나치당(NSDAP) 집권 직후 정치적 이유로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이때 위조 서류를 이용해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이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에는 스웨덴에서 제3제국 시기를 버텼다. 1937년에는 스페인 내전 취재를 위해 공화파 측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갔고, 여러 유럽 국가를 오가며 망명 사민당 그룹들과 연락을 유지했다. 1936년에는 '군나르 가스란트(Gunnar Gaasland)'라는 가명으로 독일에서 1년간 학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노르웨이-스웨덴 망명 시절 그는 주로 언론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 시기 쌓은 정치적 인맥과 우정은 전후 그가 '세계 시민'으로서 명성을 얻는 토대가 되었다.
독일 귀환
1945년 브란트의 독일 귀환은 시험적인 성격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거의 13년을 보낸 후, 그는 노르웨이 신문의 특파원 자격으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취재하며 독일에 첫발을 들였다. 그곳에서 독일 사민당과 접촉하고 전후 독일을 탐색했다. 다음 행선지는 베를린, 친구인 노르웨이 외무장관 할바르드 랑게(Halvard Lange)의 공보관으로 부임했다. 1947년, 브란트는 노르웨이인이 아닌 독일인으로 완전히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두 번째 아내 루트(Rut)와 동행했다.
새로운 이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귀화할 때 그는 '빌리 브란트'로 등록했다. 헤르베르트 프람은 과거가 되었지만, 이 과거는 훗날 그를 공격하는 무기로 쓰였다. 1961년 아데나워와의 총리 선거전에서 아데나워는 그를 "빌리 브란트 알리아스 헤르베르트 프람"이라 부르며, 출신을 배신하고 조국마저 배신할지 모르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으려 했다.
1959년 미국 방문 당시 뉴욕에서 그는 독일 정치인으로는 전례 없는 환대를 받았다.
당수 쿠르트 슈마허(Kurt Schumacher)의 눈에 띈 브란트는 그의 베를린 대표가 되었다. 1957년 사민당 소속 오토 주어(Otto Suhr) 서거 후 베를린 시장에 취임했다. 1958년 베를린 위기 때 시장으로서 국제적 인지도를 얻었고, 1959년 미국 방문 때는 어떤 독일 정치인보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61년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기민당(CDU)에 패배했다. 5년 뒤 1966년 대연정에서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어(Kurt Georg Kiesinger)를 제치고 아직 젊은 연방공화국의 첫 사민당 총리가 되었다.
쇄신과 변화
동지이자 라이벌: 1972년 원내 회의에서 헤르베르트 베너(Herbert Wehner)와 빌리 브란트.
브란트의 사민당 쇄신 열망과 연방공화국의 사회 변화 추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망명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사민당을 대중정당으로 탈바꿈시킨 고데스베르크 강령의 주창자 중 한 명이었다. 헤르베르트 베너와 함께 당을 쇄신하고 집권 가능하게 만들려 했다.
이 시기 베너는 브란트에게 중요한 당내 동지이자 최대 정적이 되었다. 엄격한 '당 기율 책임자'로 알려진 베너는 브란트를 '살롱 사회주의자'라 비난하며, 나치 독재 시기뿐만 아니라 총리 재임 중에도 결정적 순간에 책임을 회피했다고 공격했다.
장벽을 어떻게 넘을까? 1962년 베를린 장벽 앞에서 윌리 브란트와 로버트 F. 케네디.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의 충격 속에서 브란트는 에곤 바르(Egon Bahr)와 함께 동방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작은 발걸음의 정치'와 '접근을 통한 변화' 개념이 탄생했다. 총리가 되어 그 정책의 무게를 직접 체감했다. 1970년 에르푸르트에서 동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군중이 "빌리, 빌리"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당시 동독 지도부는 이 환호를 조직적 실수로 치부했으나, 이 만남과 빌리 슈토프(Willi Stoph) 동독 총리의 답방은 동독의 국제적 인정, 특히 유엔 가입 문제 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세계를 울린 한 장의 사진: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폴란드 방문 중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행한 무릎 꿇기로 브란트는 국제 무대의 중심에 섰다. 이 제스처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공식 일정에도 없었다. 슈피겔(Der Spiegel) 기자 헤르만 슈라이버(Hermann Schreiber)는 당시 이렇게 썼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이가, 무릎 꿇어야 할 이들이 감히, 혹은 할 수 없어 무릎 꿇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무릎 꿇는다. 그는 그곳에서 독일의 죄를 인정한다."
데탕트 정책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브란트는 1971년 동서 화해 정책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충격은 1970년대 독일 사회의 분위기, 즉 과거 청산에 여전히 소극적이던 시대적 맥락에서만 설명 가능하다. 1973년 발효된 동독과의 기본조약은 브란트와 사민당 데탕트 정치인들이 일군 결실이었다.
빌리 브란트 - 노벨상 수상자
부문: 노벨평화상
연도: 1971년
선정 사유: "...서독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 국민을 대표해 오랜 적대국들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선의의 정신으로 유럽의 평화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데 탁월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데탕트 정책으로 1971년 12월 10일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위원회는 그가 "서독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 국민을 대표해 오랜 적대국들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고 밝혔다.
국내적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그의 정부 아래 '급진주의자 규정(Radikalenerlass)'이 연방의회를 통과했다. 변화와 사회 개방을 추구하던 총리 재임 중 적군파(RAF)가 국가를 한계로 몰아붙이며 의회 외 반대파 일부가 급진화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다만 그때쯤 브란트는 이미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였다.
기욤 사건
믿었던 측간이 간첩이었다: 1973년 브란트와 그의 보좌관 귄터 기욤(오른쪽).
그는 동독 간첩 귄터 기욤에게 발목 잡혔다. 기욤은 총리실로 잠입해 최측근 보좌관이 되었다. 오랫동안 불화가 쌓였고 본인도 직무에 지쳐가던 총리직의 비극적 종말이었다. 1974년 5월, 오랫동안 내각 내 최실력자로 꼽히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국가원로이자 세계 시민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브란트는 정계에서 물러나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4년부터 맡아온 사민당 당수직을 1987년까지 수행하며 현안에 끊임없이 개입했다.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에 선출되었고, 직후 세계은행 총재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제안으로 결성된 남북위원회(North-South Commission) 의장을 맡았다. 올라프 팔메(Olof Palme)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직위에서 '세계 시민' 브란트는 총리 이전의 망명 경험과 인맥, 세계 정치에 대한 개인적 구상을 실현했다.
독일-독일 국경 개방
1989년 11월 10일, 브란트는 겐셔 외무장관(왼쪽), 콜 총리(가운데 뒤)와 함께 베를린 장벽 개방 현장을 목격했다.
그의 마지막 주요 공개 행사는 1989년 11월 10일 쇠네베르크 시청 발코니에서였다. 자신의 평생 업적의 결과를 바라보며 "서로 속하는 것끼리는 함께 자라난다"고 선언했다. 그의 화해와 변화 정책이 이 순간을 맞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투병 끝에 1992년 10월 8일 라인란트팔츠 주 운켈(Unkel) 자택에서 별세했다. 10월 17일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독일과 해외에서 1,500명 이상의 조문객이 참석했다. 그는 베를린 체렌도르프 숲속 묘지에 안장되었다. 고향 뤼베크에는 빌리 브란트 하우스가 위대한 정치인을 기리고 있다.
빌리 브란트 하우스 베를린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빌리 브란트 하우스는 1999년부터 사민당 중앙당사로 쓰이고 있다. 1992년 당이 빌헬름슈트라세/슈트레제만슈트라세 모퉁이 부지를 매입해 신축했고, 1996년 준공과 함께 당 명예당수 이름을 붙였다. 이 당사로 사민당은 나치 정권 시기 망명지와 본을 거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890년부터 1933년까지 당 중앙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하우스는 당사일 뿐 아니라 행사, 전시, 정기 투어 등 시민에게 열린 공간으로 운영된다. 아트리움에는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의 현대적 브란트 조각상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