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하인리히 뷔싱(Heinrich Büssing): 도로와 철도 운송의 선구자

거의 60세가 되었을 때, 노르트슈타임케 출신의 기업가 뷔싱은 트럭과 버스 제조로 업종을 전환했습니다. 1904년에는 버스 노선을 개설했죠.

스스로 개척한 성공

성공 스토리는 노르트슈타임케의 작은 대장간에서 시작됩니다. 하인리히 뷔싱은 1843년 6월 29일,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살던 볼프스부르크의 한 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었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고, 마을 학교를 마친 뒤 2년간 견습공으로 일하며 말굽을 제출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훗날 성공적인 기업가로 만들어줄 기술, 창의성, 금전 감각을 익혔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마이스터 뮐러 밑에서 2년간 일했는데, 주 1탈러를 받으며 하루 13~14시간을 일했습니다.

성장하는 산업을 향한 시선

18세가 되자 뷔싱은 유랑길에 올랐습니다. 독일 전역과 스위스를 여행하며 당시의 기술·산업 혁신을 직접 목격했고, 대규모 산업 생산이 소규모 수공업을 대체하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대장장일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브라운슈바이크의 콜레기움 카롤리눔에서 기계 공학과 건축 기술을 청강생으로 수강했습니다.

1869년: 첫 회사 설립

뷔싱의 개인 수첩에는 초기부터 기술적 메모, 특히 벨로시페드(초기 자전거)에 대한 고찰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이동성이 대규모 산업 생산의 전제 조건임을 간파했습니다. 당시 마리 치머만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던 그는 1869년 벨로시페드 공장을 세웠습니다. 작은 작업장에서 직접 설계한 철제 타이어의 이륜·삼륜 자전거를 만들었으나, 운영 자금 부족과 보불전쟁으로 인한 국제 거래 단절로 회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유델 앤 코(Jüdel & Co): 철도 분야에서의 도약

뷔싱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1870년 기계 제조사를 차렸으나 난항을 겪었습니다. 1873년부터 철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 상인 막스 유델을 재정 후원자로 영입해 '아이젠반지그날-바우안슈탈트 막스 유델 앤 코'를 공동 설립했습니다. 뷔싱의 발명 재능이 빛을 발한 곳이죠. 신호 시스템 관련 특허 90건 이상을 등록했고, 1879년에는 1,000번째 신호소를 제작했습니다. 1928년 유델 앤 코는 지멘스 운트 할스케 AG에 인수되어 오늘날 브라운슈바이크 지멘스 공장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마이 로드(My Lord)'를 연구하다

첫 부인 마리가 별세한 1900년, 네 자녀의 아버지였던 뷔싱은 두둑한 자금으로 벤츠 '마이 로드'를 구입했습니다. 이 차를 분해·연구하며 트럭 생산을 위한 기술적 토대를 다졌습니다. 2년 뒤인 1903년 10월 22일, 다섯 명의 전담 직원이 '회색 고양이(Grey Cat)'라는 시험 차량을 밤낮없이 개량한 끝에 첫 트럭이 완성되었습니다.

대중교통과 이동하는 우체통

1904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첫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뷔싱 버스는 벤데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를 하루 세 차례 왕복하며 9개 정류장을 경유, 최대 20명을 태웠습니다. 뒷좌석 나무 벤치가 싫다면 운전사에게 '고급' 티켓을 사서 앞좌석 가죽 시트에 앉을 수 있었죠. 이후 하르츠 산맥에서 4개 노선을 추가로 운영했는데, 브라운슈바이크 트럭 회사가 맡아 훗날 오늘날의 KVG(브라운슈바이크 교통 주식회사)로 발전했습니다.

버스 나무 차체에는 특별한 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우편국과의 계약에 따라 승객뿐 아니라 우편물과 소포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벤데부르크 버스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우편 버스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의 '세계화'

트럭과 버스 사업으로 뷔싱은 빠르게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1904년 하르츠 산맥 노선이 정착되자마자 런던에 섀시를 납품해 세계 최초의 런던 2층 버스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09년 베를린에서는 '화물 운송 회사'를 세워 세계 최초의 화물 운송(포워딩) 기업을 만들었고, 트럭 운송 회사 브라운슈바이크 GmbH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오데사, 리가, 바르샤바에 지점을 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1910년 뒤렌 시장의 딸 안네 베르너스와 재혼하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라아베 등과 나눈 철학적 대화

기업가로서 뷔싱은 직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자각했습니다. 이는 철학 모임 '의상 상인들(Clothes Sellers)' 회원 활동으로 더욱 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단골 멤버로는 작가 빌헬름 라아베와 피아노 제작자 테오도르 슈타인베그가 있었습니다.

수공업에서 산업으로: 성과급과 복지 혜택

뷔싱은 다양한 사내 복지를 도입했지만, 파업 노동자를 해고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복지 제도로 직원 삶을 돕고자 했습니다. 브라운라게와 오버비젠탈의 뷔싱 사택에서는 육체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연 2주간 저렴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었고, 휴가비와 주간 버스 교통편도 제공되었습니다. 도서관, 식당, 사내 의료 서비스도 갖췄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압박 속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 성과급제를 도입하자 직원들이 반발하며 저항했습니다. 뷔싱은 굽히지 않고 1919년 전 직원을 해고했고, 중재위원회도 성과급제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얼마 뒤 뷔싱의 조건에 서면 동의한 사람만 재고용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그는 최측근 두 명을 미국으로 보내 생산 현장을 시찰케 했습니다. 귀국 후 약 2,400명 전 직원의 생산 라인이 컨베이어 벨트 방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쇠퇴와 인수

하인리히 뷔싱은 1929년 10월 27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86세로 별세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명예시민이자 비밀 건축관, 훈장 수여자였던 그의 아들이 회사를 이어받았으나 여러 악재가 겹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장이 80% 파괴되고 동독 지역 생산 시설이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당시 교통부의 도로에서 철도로 화물 수송을 전환하려는 정책(축중 제한)으로 대형 트럭 시장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직접 한다'는 뷔싱의 철학이 구시대적이 되어 생산 비효율을 낳았습니다. 1960년대 설립된 뷔싱 AG는 1968년 잘츠기터 AG에 인수되었고, 최종적으로 1971년 만(MAN) 그룹에 흡수되었습니다.